같이 뛸 필요 있나요.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의 마라톤은 무모해 보이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주전자도 시간이 지나면 식기 마련입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던 무언가는 무안하게도 차게 식어 마음 한 어딘가에 숨어버렸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여름 초입이었을까요. 저녁을 먹으면서 볼 유튜브를 찾던 와중에 기안84의 마라톤이 제 알고리즘에 채택이 되었습니다. 마치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저를 힐난하듯이요. 다시 끓어오르진 않았습니다. 그저 불편했습니다. 왜 본 것만 또 나오나 싶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집 앞에서는 매년 마라톤 축제가 열립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있을 때 봐둔 마라톤 신청기간이 기억났습니다.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겁니다. 조심스럽게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아직 마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5km, 10km 코스 중 고민을 하다가 10km로 신청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신발장에서 영원히 잠들 줄만 알았던 러닝화를 꺼내 신었습니다.
한동안 안 뛰던 사람이 갑자기 뛴다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탁구를 꾸준히 쳤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목표한 만큼은 뛰었으나 근육통에 시달려 탁구도 쉬어야만 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어떻게 이걸 매일 뛰는 사람들은 이 관문을 다 겪은 것일까. 저는 페이스를 지킨다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달리기라 함은 그저 전력질주 밖에 없었습니다. 자세를 공부하고 나름대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예전 쌩쌩하던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천천히 뛰었습니다. 빨리 걷는 사람만큼 뛰었습니다. 다리가 아프지 않도록 근육이 놀라지 않도록 달래 가며 뛰었습니다. 1시간 뛰기를 성공했을 때 성취감은 대단했습니다. 속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이 땀에 절여졌습니다.
그 1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습니다. 멈추고 싶은 충동을 수도 없이 이겨내며 뛰었습니다. 날이 습하여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가웠습니다. 얼굴의 땀을 훔쳐가며 뛰었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하늘은 응원이라도 하려는 듯이 소나기를 퍼부어 주었습니다.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은 너무나 상쾌했습니다. 시원한 빗줄기가 데워진 몸을 식혀줍니다. 시원한 욕조에 몸을 담가 쿨다운을 하며 오늘 달렸던 길을 곱씹어 봅니다.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여름 내내 뛰었습니다. 저는 야외활동이 드물어 선크림을 다 써본 적이 없습니다. 올해 여름, 처음으로 선크림을 바닥까지 써봤습니다. 더우면 최대한 아침에 나가려고 했고 비가 오는 날에도 달리기 위해 여분의 신발을 구매했습니다.
나름 목표도 있었습니다. 10km 코스를 1시간 이내로 들어오는 것. 처음 10km를 주파했을 때는 1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목표에 대한 걱정보다는 처음 10km를 안 쉬고 달렸다는 것에 더 기뻤던 것 같습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는 해봤습니다. 마라톤 축제가 가까워 올수록 기록은 정체되어 인터벌과 같은 훈련을 독학으로 해보았으나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달리기가 싫어졌었습니다. 그래서 달리는 그 자체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장마가 지나가고 한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습니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속도는 점점 올라왔고 페이스메이커의 도움과 파이팅으로 목표한 바를 가까스로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달리다 보니 자그마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같이 달려본 적이 없습니다. 온전히 내 호흡에 집중하고 내 발 방향에 집중하고 내 팔에 집중합니다. 달리기는 완전한 자기 몰입을 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사색에 잠길 수도 있고 음악을 듣는다면 평소에 흘려들었던 부분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달리기라는 것은 같이하기에는 아까운 운동인 것 같습니다. 타협하고자 하는 나와 싸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누군가 북돋우지 않아도 누군가 끌어주지 않아도 온전히 나의 힘과 의지로 나아갈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저만치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탁구라는 생활체육을 즐기고 있습니다. 경쟁심과 승패가 뚜렷한 스포츠입니다. 그리고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어울릴 수 있어야 탁구를 즐길 수 있고 즐기다 보면 비교가 됩니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정체됩니다. 단계가 나누어져 있으며 상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토너먼트입니다. 물론 그 경쟁심과 투쟁심에서 오는 짜릿함도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달리기는 혼자서 하고 싶습니다. 조용한 새벽녘이나 상쾌한 아침에 몸이 채 잠에서 다 깨지 않았을 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주고 나만의 리듬으로 첫 발을 뗍니다. 호흡에 집중하고 턱, 어깨, 팔, 허리, 다리까지 계속 생각하면서 뜁니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시작하면 어느 순간엔 나의 최고 페이스에 도달합니다.
저는 달리기를 혼자 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달리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도 없습니다. 달리지 않으면 오늘의 나를 이길 방법이 없기에 아침에 일어나 신발끈을 묶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더 나은 기록도 덤으로 따라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