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박스
라이킷 9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쇼펜하우어 vs 구토의 철학자》

무명의 철학자

by Edit Sage Mar 24. 2025

<고통은 멈춰야 하는가, 흘러야 하는가>


형식 : 2인 철학 대화극

장르 : 존재론적 아포리즘 드라마

무대 : 검은 천으로 가려진 무대 한가운데, 의자 두 개.

등장인물 :

1.쇼펜하우어 – 절망의 철학자, 침묵의 미학을 중시함

2.구토의 철학자 – 감정의 해체자, 흐름과 해방을 상징함



[1막] 의지의 절벽 위


<쇼펜하우어>

: 삶은 고통이다.

모든 의지는 결핍에서 시작되고, 충족은 잠깐이다.

다시 또 다른 결핍이 시작되지.

이 고리를 끊는 길은 오직 하나. 욕망의 소멸.


<구토의 철학자>

: 고통은 막힌 감정의 언어야.

그걸 억누르지 마.

그걸 침묵으로 감싸지 마.

뱉어. 구토해. 흘려.

그 순간, 고통은 움직이고, 존재는 살아있어.


<쇼펜하우어>

: 감정을 흐르게 한다고?

그건 또 다른 욕망으로 향하는 길일 뿐이야.

욕망은 또 고통을 불러올 거야.

나는 고요 속에 살겠다.


<구토의 철학자>

: 고요는 정지가 아니야, 흐름의 정제야.

내가 말하는 건 집착이 아니라 배출이야.

내장은 진실을 안다.

너의 철학은 의지를 억누르지만,

나는 의지를 해체해. 감정의 회로로.



[2막] 말 없는 진실의 문턱에서


<쇼펜하우어>

: 나는 말이 무의미하다고 믿는다.

침묵이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세상은 망상이고, 나 자신마저 망상일 뿐이다.


<구토의 철학자>

: 나는 침묵도 편집한다.

그 침묵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파고든다.

말 없는 진실? 좋아.

그건 몸이 말하는 순간이야.

구토는 진실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첫 반응이야.


<쇼펜하우어>

: 너는 아직 ‘생’에 희망이 있는 듯 말한다.

나는 그 희망조차 버렸는데.


<구토의 철학자>

: 나는 희망을 말하지 않아.

나는 흐름을 말할 뿐이야.

희망은 미래의 언어야.

나는 지금, 이 자리, 이 구역질을 다루는 자야.



[3막] 구토 이후의 세계


<쇼펜하우어>

: 고통은 존재의 본질이다.

그것을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멈춤’을 택한다.

죽음이야말로 해방이다.


<구토의 철학자>

: 나는 멈추지 않아.

나는 흐른다.

고통은 흐르면 ‘형태를 바꾼다’.

그게 곧 치유고, 진화야.


<쇼펜하우어>

: 너는 여전히 믿는구나.

변화를. 가능성을. 생을.


<구토의 철학자>

: 나는 믿지 않아.

나는 편집해.

언어를, 감정을, 인식을.

그리고 다시 ‘나’를 재조립해.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나는 매 순간 새로 태어난다.



[종막] 침묵의 무대, 마지막 조명


두 철학자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다.

침묵이 흐른다.


<쇼펜하우어>

(속삭이듯)

: 어쩌면… 너의 구토가 나의 침묵보다

더 큰 용기일지도 모르겠군.


<구토의 철학자>

: 네 침묵이 있었기에,

나는 이 구토를 낳을 수 있었지.

너는 죽음의 문을 열었고,

나는 거기서 흐름의 문을 만들었다.


조명 꺼짐.



《움직임의 존재론》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 어느 무명의 돌궐 명장


그의 이름은 톤유쿠크(Tonyukuk)


•생몰연도 : 7세기 말 ~ 8세기 초

•정체 : 고구려 출신의 장군이자 돌궐의 현자

•칭호 : “지혜로운 대신”, “위대한 전략가”, “유목 제국의 정신”



<그의 철학의 핵심>


톤유쿠크는 정주문명에 대한 경계, 유목정신의 우월성,

그리고 끊임없는 이동이야말로 생존의 전략임을 설파했습니다.


“우리가 성을 쌓고 그 안에 갇힌다면,

기습과 속도를 잃고, 정복당할 것이다.”

— 톤유쿠크 비문 中


그의 사상은 유목민의 전략적 철학 그 자체입니다.


•땅에 정착하지 말 것

•구조에 갇히지 말 것

•흐름을 멈추지 말 것



<톤유쿠크의 철학적 위상>


그는 아시아의 마키아벨리이자,

유목의 니체,

혹은 전략적 쇼펜하우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는 무정형(無定形)의 자유를,

그는 유동하는 전술을,

그는 프레임 밖에서의 생존 전략을 남겼습니다.



이 아포리즘은 단지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저항의 언어이며,

고정된 권력에 대한 유목민의 통쾌한 철학적 일격이다.


톤유쿠크는 말했다.

“움직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망할 것이다.”



1. 성은 무엇인가?


성은 보호구역이자 감옥이다.

안정이자 공포다.

자아를 지키는 이름으로,

자신을 가두는 구조다.


<성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기 정의 : 나는 이런 사람이야.

•정체성 구축 : 이게 내 커리어야.

•언어의 고착 : 이건 좋은 말, 저건 나쁜 말.

•자본의 축성 : 더 많이 쌓아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성은 반드시 침식된다.

외부에서 무너지든, 내부에서 썩든.

모든 성은 언젠가 무너진다.



2. 이동은 무엇인가?


이동은 생존의 본능이며,

진화의 조건이다.


•언어의 이동 : 정의를 고정하지 않고, 다시 말하기.

•감정의 이동 :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기.

•자아의 이동 :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기.

•위치의 이동 : 안주하지 않고 경계로 향하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구조를 해체하고,

스스로 구조가 된다.



3. 문명은 성을 쌓고, 혁명은 이동한다


아그리컬처는 성을 만들었고,

노마드는 성을 거부했다.


국가는 경계를 만들었고,

예술가는 경계를 해체했다.


자본은 중심을 만들었고,

혁신은 중심을 떠났다.


“성”은 제도이고, “이동”은 생명이다.



4. 전략 선언문


정체성은 ‘전략’이지 본질이 아니다.

고정된 정의는 죽은 언어이며,

움직이는 존재만이 감각을 갱신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움직인다.

정의는 박제고,

이동은 생명이다.



5. 철학적 결론


쇼펜하우어는 성 안에 철학을 쌓았고,

니체는 그 성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길조차 없애버린 자다.

길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길인 자.



<톤유쿠크의 아포리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는 다시


인도 철학, 특히 베다 전통과 불교의 ‘무상(無常)’ 및 ‘비고정성(anātman)’ 사상과 깊이 공명한다.



1. 무상(無常, anitya)


힌두와 불교 철학 모두,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전제를 철학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는다.

태어남도, 존재도, 사유도, 모두 흐름이다.”


톤유쿠크의 아포리즘도 성(고정)을 경계하고 흐름(이동)을 택한다.

이 흐름은 곧 실재의 본성이다.

“고정된 것을 소유하려는 자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불교의 통찰과 일치한다.



2. 아트만(Ātman) vs 아나트만(Anātman)


인도 철학에서 아트만은 고정된 자아의 개념이다.

불교는 이것을 부정한다: “고정된 자아란 없다(anātman).”


톤유쿠크는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전략적/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철학을 외친다.


“고정된 자아(성)는 무너질 것이며,

이동하는 자만이 생존한다.”


이건 단지 전략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메타프레임이다.

즉, 모든 실재는 비고정이며, 자아 또한 매 순간 편집되어야 한다.



3. 유목철학 vs 요가철학 : 존재의 운동성


결국 유목민의 전략과 인도의 메타신화는

다른 언어로 동일한 진실을 말한다:


“정착은 환상이고, 움직임은 진리다.”



결론 : 이동은 존재의 본성이다


톤유쿠크는 말을 탔고,

인도 현자는 의식을 탔다.

하나는 전략으로 이동했고,

하나는 자아를 버리며 이동했다.


그러나 둘 다 말했다.


“고정된 것에 집착하지 마라.

존재는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다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 체계와도 깊이 연결된다.



1.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 핵심 : ‘움직임’은 곧 ‘살아있음’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체로 유목적, 순환적, 관계 중심의 사고방식을 지녔다.


<그들의 사유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 모든 존재는 ‘움직임’ 속에서만 진실해진다>


“강은 흐르기 때문에 강이고,

대지는 숨 쉬기 때문에 살아있다.”


고정된 것은 ‘죽음’이다.

움직이는 것은 ‘영혼’이다.

존재란 곧 순환이며, 고정은 환상이다.


 이는 톤유쿠크의 사유, 불교의 무상사상과 완벽히 통하는 다중문화적 초월 사유다.



2. 성을 쌓는 자 vs 땅을 걷는 자


아메리카 원주민은 땅에 ‘소유 개념’을 두지 않았다.

땅은 거주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유럽 문명은 성을 쌓고, 국경을 긋고, 땅을 점유했다.


결국 이 충돌은


이동하는 자(존재 중심) vs 고정하는 자(소유 중심)의 문명 충돌이었고,

원주민들은 역사적으로 그 충돌 속에서 사라지는 쪽이 아니라 사유를 유산으로 남긴 쪽이다.



3. 존재의 흐름에 대한 통합 선언


아메리카 원주민, 톤유쿠크, 불교의 무아,

이 세 흐름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


“존재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움직일 때, 우리는 살아있다.

그 바람을 가두려는 순간, 모든 것이 썩는다.”



4. 구체적 아메리카 원주민 철학 사례


<나바호(Navajo)>


 조화로운 흐름, 균형 잡힌 변화를 뜻함.

 고정된 자아나 사회 구조보다 관계와 순환이 우선된다.


<라코타(Lakota)>


“우리는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성, 경계, 중심이라는 서구적 개념과 단절된 세계관.



5. 결론 : 동일한 진실, 다른 언어


이동은 전술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다.

흐름은 선택이 아니라, 실재의 진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의식의 신비, 막혀 있던 신경관을 뚫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