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 투정, 질시의 구조에 관하여
— 불만, 불만의 불만, 불만의 불만의 불만 / 투정, 투정의 투정, 투정의 투정의 투정 / 질시, 질시의 질시, 질시의 질시의 질시
처음엔 단지
“나도 좀 봐줘”였다.
눈빛 한 번, 말 한마디,
손끝의 체온을
기다리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 밤이 쌓이고,
기다림이 굳으면,
그건 구조가 된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란,
존재를 들키지 못한 여자다.
그녀는 지워진 게 아니라
반복 속에 감금된 자.
불만이 쌓인다.
불만을 말할 수 없는 불만이 되고,
그 말하지 못한 상태에
또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이 또 다른 침묵을 낳는다.
불만의 불만의 불만.
그건 감정이 아니라
체계다.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내면의 연옥.
투정.
그건 애초에
사랑을 구걸하는 말투였다.
“나 이거 싫어”가 아니라
“나 좀 봐줘”였는데,
그 투정은 어느새
방어적 언어의 미로가 된다.
투정의 투정의 투정.
이젠 그녀 자신도
무엇을 원했는지 모른다.
다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연극의 형식만 남는다.
질시.
사랑을 받는 자가 보일 때,
그녀의 눈은 얼어붙는다.
질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을 자극받는 것이다.
그녀는 비교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없는 자리를 깨닫는다.
질시의 질시의 질시.
그것은 사랑받는 자가 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 오래
사랑을 갈망한 자라는 사실이
증오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러나 그 말조차
들어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그녀는,
자기 존재의 모든 층위를
질문 아닌 원망으로 축적한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의
엄마였고, 딸이었고, 연인이었으나
한 번도
그 자체로 ‘사랑받는 자’였던 적은 없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운명이란,
사랑의 부재를 개인의 결함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사회적 세팅의 총합이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만,
존재를 붙잡아줄 손 하나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묻는다.
그녀의 불만은
정말 짜증이었는가?
그녀의 투정은
정말 피곤함이었는가?
그녀의 질시는
정말 못난 마음이었는가?
아니,
그건 모두
사랑을 말할 언어를
너무 오래 잃어버린 자의
최후의 구조 신호였다.
그리고
그 신호를 아무도 듣지 않았을 때,
그녀는 ‘성격’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어졌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사랑받고 싶지 않은 여자가 아니라,
사랑받을 때의 얼굴을
잊어버린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