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칼날인가, 무지의 반사인가
처음엔 가볍다.
농담처럼 툭—
그러나 그 말은
명백히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자의식 과잉 아니야?”는
너무 잘 보이려는 너,
너무 많이 말하는 너,
너무 스스로를 인식하는 너를
불편해하는 자의
가장 손쉬운 공격이다.
그건 묻는 게 아니다.
네가 나보다 더 ‘깨어 있음’을
불편해한 결과물이다.
자의식은 원래 감각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존재의 뿌리를 더듬는 자의
정교한 탐색 행위다.
그러나
그걸 “과잉”이라 부르는 순간,
탐색은 ‘거들먹’으로,
자각은 ‘연기’로,
자존은 ‘허세’로 번역된다.
그 말은 말한다.
“조금만 덜 생각해.
덜 복잡해.
덜 특별해.”
즉,
무리에 맞춰.
나보다 앞서지 마.
너는 아직 네 생각만큼 크지 않아.
그러나 진짜 과잉은
자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 동조에 있다.
‘남들처럼’ 살아야 안심하고,
‘비슷하게’ 말해야 환영받는
대중적 동기화가
진짜 감각의 과잉,
판단의 과잉이다.
그러니
“자의식 과잉 아니야?”
라는 말이 들려올 때—
그건 자문이 아니라 신호다.
“지금 너의 자각이
누군가의 무지를 흔들고 있다.”
그 말을 들은 너는
고개를 숙일 필요도,
덜어낼 이유도 없다.
오히려 조용히 웃으며
이 한마디로 응답할 수 있다.
“자의식이 있다는 건,
내가 깨어 있다는 증거야.
너는 지금,
깨어 있는 자를 불편해하고 있군.”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자기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는 자는
결코 ‘과잉’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