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혁의 실수

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by 한우물

산정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드넓은 산장에 우거진 숲과 띄엄띄엄 배치된 한옥과 양옥, 대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 등, 처음 오는 손님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손색없는 풍광이 펼쳐졌다.

준혁 일행은 예약해 놓은 대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현대식 본관 건물 2층 창가 좌석에 자리한 후 모둠 한우를 시켰다.

찬이 깔리고 숯불이 들어오고 고기가 들어오자 게이꼬가 자기도 죽 대신 고기를 먹겠단다.

다들 놀라서 괜찮겠냐고 물으니 괜찮을 것 같다고 하였다.
준혁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소화제를 준비해 온 터라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약을 준비해 왔으니 맛있게 드세요."


물론 일본에도 야끼니꾸(やきにく, 焼肉)라 하여 숯불구이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따라 나오는 쯔끼다시(つきだし, 곁들이 찬)는 상추, 깻잎, 고추, 마늘, 쌈장을 위시해서 상 하나를 가득 메우는 한국의 밑반찬과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약 30년 전, 준혁이 오사카의 한 한국식 야끼니꾸 집을 방문했을 때는 각 테이블 위에 쌈 싸 먹는 방법에 대한 그림 설명서가 비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게이꼬와 레이꼬는 준혁이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익숙한 솜씨로 구운 고기를 상치와 깻잎에 싸 먹었다.


두 사람 다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찍어 먹고 쌈 싸 먹고, 마지막에는 모든 찬그릇까지 싹 다 비웠다.

그런 게이꼬의 모습에 준혁은 내심 '진짜 환자 맞나?' 싶었다.

그동안 세 가지 암으로 고생하면서 잇몸이 안 좋아 단 하루도 집 밖에서 잘 수 없는 사람인 데다 죽밖에 못 먹을 것이라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고기구이와 생야채를 저렇게 다 씹어먹다니! 저런 괴력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준혁은 손님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았다.

죽이나 몇 숟갈 뜰 줄 알았던 게이꼬가 이렇게 왕성한 식욕으로 먹어내는 걸 보니 더욱 좋았다. 그러나 식후에는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간 대만제 '강위산, 强胃散' 한 포를 게이꼬에게 먹게 했다.

다들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자리를 옮겨 발아커피숍에 가서 그 가게에서 만든 수제 쿠키와 함께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추출한 루왁 커피를 맛보며 또 다른 각도에서의 풍광을 즐겼다.


입과 눈이 호강하고 오랜 친구와 함께하는 마음 또한 넉넉했다.

이것으로 모든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나무 계단, 돌계단을 내려오다 뜻하지 않은 사달이 났다.

게이꼬가 돌계단에서 무릎을 꺾고 털썩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제야 준혁은 손님맞이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우려했던 점인 ‘얼마나 걸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명제에 대해 그만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하루의 필름이 휘리릭 거꾸로 돌아가면서 지난 시간 동안 마음에 걸리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1) 자갈치 시장 2층 안쪽 건어물 상점에서 쇼핑 후 돌아 나올 때 게이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2) 옥상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도 계단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3) 산정에서 이층으로 올라올 때, 이층에서 커피숍으로 옮길 때도 적지 않은 계단을 올라갔다.

4) 커피숖에서 내려올 때도 계단이 많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왜 이러한 사실을 간과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는 본인 외에는 모른다.
* 비록 본인이라 할지라도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 아무리 환자라 하더라도 지체장애인인 내가 큰 어려움 없이 걸을 정도면 저 양반도 괜찮겠지.

바로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는 위의 요소들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준혁이 몰랐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게이꼬의 나이였다.

그동안 준혁은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기껏해야 나보다 한 열 살 정도 많겠지?’라고만 생각해 왔다.

왜? 그렇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2016년 10월 당시, 그녀의 나이는 84세. 준혁보다 무려 스물한 살이나 많았던 것이다.


한동안 집 밖 출입도 잘 못하던 84세 고령의 암 환자인 그녀는 그날 혼신의 힘을 다해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다 그만 다리가 풀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