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어 남으리

한·일을 잇는 우정의 강물

by 한우물

준혁은 지난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본 사회, 그것도 30년 전의 보수적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가정이 있는 부인이 처음 만난 외국인 남정네들을 집에까지 데리고 와 저녁식사 대접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일진대 그걸 감행한 게이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분명, 이런 흔치 않은 이벤트를 통해 냉랭했던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개원의가 쉬는 날은 일요일 하루.

그런 날, 남편 밥도 안 해주고 하루 종일 예정에도 없던 가이드 한답시고 밖을 싸돌아다니던 마누라가 그것도 모자라 외국인 남자들까지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데 좋아할 남편이 어디 있겠나? 이런 의미에서 그날 보인 나까무라 원장의 환대는 같은 남자로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어름처럼 싸늘해진 아내, 자신의 욕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내가 먼저 손 내밀어 부탁하니 남편으로서는 오죽이나 반가웠으랴!


게이꼬 씨 문상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후쿠오카 공항에서도 레이꼬는 3년 전 김해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댔다. 만났다 헤어질 때면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끝까지 따라오며 작별을 아쉬워하던 사람들. 그럴 때마다 '일본인 치고 참으로 정이 많은 사람들이로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어려운 형편에 시집와서 오랫동안 소외된 존재로 살아온 사람.

시부모 돌아가시고 시집 식구들 물러가고 난 후 친인척들과는 아예 연을 끊다시피 하고 산 사람. 이제 남편과 정 좀 붙이고 살아가려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암에 걸려 죽고, 그 후 18년 동안 딸과 함께 살다 간 사람.


친구도 없고 친척도 끊고 살며 정 줄 곳이 없었던 사람들.

그런 그들이기에 한나절의 짧은 만남 후에 헤어지는 작별의 시간조차 그렇게 아쉬웠나 보다. 그런 그녀이기에 ‘샤론파스’를 들고 직접 부산으로 찾아온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곧바로 여권부터 내러 달려갔나 보다.


슬픔도 기쁨도 잘 드러낼 줄 모르고 살아온 삶.

그러기에 몇십 년 만에 만나면서도 활짝 핀 환한 웃음 대신 수줍은 미소만 짓고 말도 별로 없었구나. 딸과 함께 멋진 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거나, 경치 좋은 곳을 보면 "다음에 닥터 한이 오시면 여기 한번 모시고 와야겠다." 하며 유언에까지 남겼던 이유도 이제 알겠구나.


그런 곳들이 바로 뉴오따니호텔 커피숖이요, 힐튼호텔의 전망 좋은 방이요, 준혁이 후쿠오카에 도착한 날 저녁을 대접했던 중국집이요, 문상 후 렌트한 승합차를 타고 강변을 따라가던 드라이브 코스요, 강나루터의 조그만 이탤리언 파스타집이요, 식사 후 들른 규슈대학 캠퍼스였구나.


레이꼬는 이전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지막 입원 시) 병원에서 어머니와 내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안 우리는 두 번에 걸친 부산으로의 여행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들과의 멋진 대화, 훌륭한 음식들, 아름다운 풍경 등….”

편지를 읽을 때는 '당시 시간이 너무 없어 특별한 곳을 구경시킨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았을까?'라며 의아해했는데 이제 이해가 간다.


당시 개업의의 삶이라는 게 병원문 닫고 일주일 정도 시간 내어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게다. 그런 남편에, 친구도 없는 그녀가 일생에 해외여행을 몇 번이나 가 보았을까? 어쩌면 부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번에 걸친 부산 방문이 그들에겐 두고두고 함께 공유할 즐겁고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었나 보다.


이제 게이꼬 씨는 가고 없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레이꼬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 아주 특별한 사람(such a special person).

*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사람.

* 어머니의 생을 평안하게 마감시켜 준 고마운 사람.


게이꼬 씨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것은 아마 '인생 후반전에 만난 유일한 남자 친구' 정도 될 것이다.


그녀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담고 갔을까?

어쩌면 그녀는 나를 일종의 '퀘렌시아(Querencia)'로 기억하며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준혁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또 다른 생각의 물결이 뇌리로 넘쳐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입장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지구별에서의 마지막 미션을 끝내고 내 본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떠나보내는 입장이 된다.

지난 세월 나와 함께 하며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겨질까?

이는 오롯이 그들 몫이고, 마음 판에 그려지는 그림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 보았다. "너는 뒤에 남는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도움을 준 사람?

고마운 사람?

정 많은 사람?

따뜻한 사람?

존경할만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눈물 많은 사람?

밥 잘 사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

겉은 딱딱하나 속은 말랑말랑한 사람?

......


준혁은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말 하나를 골라 자신의 가슴속에 담았다.


~ 때때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잊지 못할 사람 ~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