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까지 봐야 할 이유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2008년
내가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오로지 조카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 제작 일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자신이 이 작품 제작에도 참여하고 영화에도 출연하니 한 번 보라 하여 본 것이다. 조카가 영화에 출연한다고 하니 얼마나 호기심이 갔겠는가?
그런데 영화 내내 '얘가 하마나 나오나 하마나 나오나?' 하고 기다렸는데 끝내 그의 얼굴은 안 보였다. 영화 끝난 후 '걔가 사기를 쳤나? 내 눈이 어찌 됐나?' 하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었는데 마지막쯤에 가서 엑스트라 이름 중에 '우체부 – 한성수'란 글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 아닌가?!
'아니, 그런데 왜 화면에서 본 기억이 없지? 조카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후,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우체부가 나오는 장면을 유심히 보기로 했다.
영화 초반에 월남 파병 간 남편이 시골에 있는 아내 수애에게 보낸 편지를 우체부가 전하러 오는 장면이 나온다. 우체부를 보자 "옳거니!" 하며 눈을 부릅뜨고 그만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카메라는 큰 가방을 둘러맨 우체부가 그 집에 들어가는 장면을 멀리서부터 찍기 시작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편지를 받는 수애를 클로즈업시켜 나갔고 우체부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 후, 편지를 전하고 우체부가 돌아가는 장면으로 전환되길래 '이제야 조카 얼굴을 보겠구나.' 싶었는데 그만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내 입에서는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2015년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바쁘신 몸이 어인 일로 나에게 전화를 다 했냐?
용건인즉슨 'tvN'에서 방영한 '영원한 청춘'이란 드라마의 속편을 한국의 CJ와 베트남 국영방송 VTV 3(우리로 치면 KBS2 같은 곳)가 합작으로 사전 제작에 들어가는데 감독과 여주인공은 베트남 쪽에서 맡고 극본, 남자 주인공, 제작은 한국 측에 맡는데 거기에 내 조카가 CJ 측 제작 PD를 맡게 되었단다.
드라마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전편 드라마의 한류 아이돌 남자 주인공이 서울에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는 동안 베트남 여친이 와서 지극정성을 다한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나중에 재활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베트남으로 가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순정 표 청춘 드라마다. 문제는 1회에서 5회 초까지 전부 병원에서 벌어지는 시추에이션이라 나에게 대본을 보낼 테니 읽어 보고 잘못된 곳 손 좀 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에 조카의 부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쉽게 생각했다.
'의학 전문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일반 영화에서 종종 보는 의료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상황 설정, 병명과 맞지 않는 증세, 병원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병원 장면 등, 그런 코미디 같은 황당 시추에이션 정도만 좀 바로 잡아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정도로 말이다.
한데 막상 대본을 받아보니 이제 내가 황당해진다. 첫 회부터 바로 교통사고다. 주인공인 한류 스타가 건널목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음주운전 차에 치여 심하게 다친다. 119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가고 거기서 바로 수술실로 가서 여러 가지 수술을 받는 등 상황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데 그에 따른 병명이라는 게 한둘이 아니다.
1. 대퇴부와 무릎, 팔목 등에 복합 골절로 핀 고정술 시행
2. 다발성 장기 손상과 복강 내 출혈로 비장 절제술 시행
3. 수술 도중에 저혈압성 쇼크로 인한 심정지가 한번
4. 두개골 골절로 인한 뇌출혈
5. 뇌 손상에 의한 신경학적 이상 증세 및 기억상실증
6. 회복기 재활치료 및 더 전문적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이런 병원 상황만 드라마 첫 회부터 5회 초까지 죽 이어지는지라 분량도 만만찮을 뿐 아니라 너무 많은 과가 개입되다 보니 복부 전공 영상의학 전문의인 나로선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 해줄 수도 없고… 결국 방법은 각과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수밖에.
우선 119차량 내 및 응급실 장면에선 응급의학과, 수술실 상황에선 정형외과와 일반외과, 두개골절 및 소량의 뇌출혈에 대한 치료는 신경외과, 병실에서의 신경계 이상증세 및 기억상실증에 대해선 신경과와 정신과, 재활치료에 대해선 재활의학과,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필요한 영상 검사에 대해선 영상의학과. 도합 여덟 개나 되는 과가 관련되어 나 이외에 일곱 과 전문의의 자문이 필요했다.
"아이고, 골이야! 내가 미쳤지. 이런 골 아픈 걸 맡아가지고서리."
엔딩 크레딧
나는 각과 교수들 명단을 앞에 놓고 내가 제일 마음 편히 부탁할 수 있는 사람 7명을 골랐다. 다들 내 제자 아니면 대학 후배들이다 보니 나의 부탁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때부터, 한 회 한 회 대본이 넘어올 때마다 해당과 교수들에게 복사본을 보내고 자문을 구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대 교수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바쁘다. 같은 병원에 근무해도 일 년 내내 얼굴 한 번 못 보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심지어는 같은 과 내에서도 세부 전공이 다르면 의국 회의 시간 외에는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임상과의 경우 외래를 보고 있을 때나 회진 돌 땐 환자 보는데 방해될까 봐 전화 못 하고, 수술실에 있을 땐 아예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통화 한 번 하려면 시간차를 두고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야 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각 장면(scene)에 나오는 상황 설정, 쓰는 약물, 의료진이 나누는 대사, 배우가 연기할 증세까지 하나하나 세밀히 살펴 고칠 것 고치고 더할 것 더해서 무사히 끝내고 자문 교수들에게는 그동안 도와준 데 대한 치하와 함께 감사의 선물을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는 드라마 첫 회부터 마지막 38회까지, 엔딩 크레딧에 의료자문 'HAN SANG SUK' 이란 내 이름 석 자가 올라가는 대가가 주어졌다.
나는 드라마 한 편에 그렇게 이름이 많이 들어가는 크레딧은 처음 봤다. 내 이름은 크레딧 화면이 15번 넘어가야 나온다. 그걸 보고 있는 동안, '여기까지 보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라는 의문과 함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카는 다음과 같이 생색을 냈다. 내 이름을 사람 이름이 제일 적게 들어가는 화면에 배치했고,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기 쉬운 마지막 부분에 배치해 주었노라고. 크레딧 하나에도 이런 심오한 뜻이 숨어있을 줄이야.
나오는 사람들 · 안 나오는 사람들
나는 '님은 먼 곳에'를 다시 보면서 편지 왔단 말 한마디하고 사라지는 얼굴 없는 단역 출연자도 크레딧 명단에 올려준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영화에서는 저런 역할까지도 귀하게 여기누나!'
그리고 '영원한 청춘'에서 의료자문을 해주게 되면서는 '영화 한 편 만드는데 감독과 주·조연 배우만 애쓴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이들의 열정과 땀방울이 녹아들어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관객인 내가 그런 걸 알아주기는커녕 관심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 크레딧도 영화의 한 부분이다. 배우들 나오는 장면이 끝났다고 해서 영화가 다 끝난 건 아니다. 그 크레딧 속에는 무대 뒤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쓴 많은 사람이 얼굴 대신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 후,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고 그대로 발딱 일어나 가는 대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느긋이 앉아 자막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품는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는 또 다른 맛이 생겼고 인상에 남는 크레딧도 생겼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엔딩 크레딧이 '만든 사람들' 내지는 '나오는 사람들'이란 타이틀 하에 이름이 출연자들의 이름이 죽 올라가는데, 한 영화에선 '나오는 사람들'이란 제목 밑에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 이름이 나오고, 곧이어 '안 나오는 사람들'이란 제목하에 제작자, 감독 등 영화 장면에는 안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무대는 연극이나 영화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 어디에나 무대는 존재한다.
가정이란 무대, 직장이란 무대, 단체란 무대 등. 그런 무대에서 우리는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빛을 발하는 이면에는 눈에 띄지 않는 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과 헌신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제 우리 간판급 주연 배우에게뿐 아니라 조연 배우에게도, 나오는 사람들뿐 아니라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보자. 그리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자. 그럴 때 이 세상은 보다 아름답고, 보다 훈훈하고, 보다 살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