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08 위(天)를 보는 눈, 아래(地)를 보는 눈

눈이 둘인 이유 7

by 한우물

사람에게는 두 개의 눈이 주어졌다.

그 결과 한쪽 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다른 한쪽 눈의 시력이 나쁘면 잘 볼 수 없다.

또한, 두 눈이 협력하여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없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두 눈으로 조화롭게 바라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 한 곳만 보지 말고 그 반대편도 보라고, 그 너머도 보라고, 그 안도 보라고 그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눈앞의 일에 급급하여 한쪽 눈만 뜬 채 한 곳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일에 너무 익숙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제 그동안 거의 감다시피 해온 한쪽 눈을 뜨는 연습을 해 보자.


여기 잔이 하나 있고 그 안에는 물이 채워져 있다. 이 물을 다른 사람의 잔에 따르고 나면 내 잔은 비게 된다. 물로 충만하던 내 잔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텅 빈 공(空)이 된다. 누군가에게 득(得)이 되면 누군가에게는 실(失)이 되고, 과학적으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쯤 된다. 이것이 땅(地)의 이치(理致)다. 하지만 하늘(天)의 이치는 다르다.


내 잔 속의 물을 나보다 훨씬 더 갈급한 사람에게 부어주고 나면 내 잔은 빈 공(空)의 상태가 아니라 공기로 가득 찬 충(充)의 상태가 된다. 눈에 보이는 물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로 찬 텅 빈 충만함이다.


물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며칠 못 가서 죽는다. 하지만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몇 분을 못 버틴다. 공기는 소중함을 넘어서 절박한 것이다. 내 잔을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우기 위해선 먼저 그 잔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하늘(天)의 이치다.


어떤 일을 하건 먼저 하늘의 뜻을 살핀 후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위만 보고 걷는 사람은 바로 눈앞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은 머지않아 다가올 낭떠러지를 예측하지 못한다. 넘어지면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비록 생채기가 생겼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낫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경험은 늘어나고 지혜는 증대된다.

하지만 이 길이 전부인 양, 이 길이 영원할 것인 양 땅만 보고 걷다가 갑자기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면 그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울까?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죽음의 실체가 무언지, 언제 닥칠는지, 죽음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으로의 여정이고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 했다. 이렇게나 소중한 죽음은 외면한 채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어리석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사는지에 대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이 궁하면 죽음 후에 갈 곳이 어딘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죽음 후에 어디로 갈지를 알려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떠나온 본향(本鄕)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 벗은 발로 뛰어나와 반가이 맞아 줄 부모가 기다리는 본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때가 되면 돌아갈 날이 기다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 본향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땅을 보는 눈만 크게 뜨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눈도 함께 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 나오는 한 사람의 어릴 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인생과 돌아갈 본향(本鄕)의 의미에 대해 한번 깊이 묵상(默想) 해 보자.


때는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 년 후. 조그만 마을에 한 사내아이가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온종일 땅에 금 그어놓고 땅따먹기 하고, 딱지치기 하고, 구슬치기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저녁이 되니 각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아이 어머니들은 대문 밖에 대고 밥 먹으러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아이들은 놀다 말고 하나둘씩 집으로 달려갔고 놀이터에는 이 아이 혼자 남게 되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그는 부르는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땅 한 뼘 더 딸 거라고, 딱지 한 장 구슬 하나 더 모을 거라고 온종일 친구들과 옥신각신하며 악착같이 모은 딱지가 한 호주머니 가득, 다른 주머니에는 구슬이 가득, 땅에는 내 땅이라고 그어놓은 영역이 큼지막한 데, 막상 갈 곳 없는 자신에게 그딴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재미나게 놀다 말고 엄마가 부르니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지금쯤 따끈따끈한 밥상 앞에서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맛있게 재밌게 밥 먹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위의 이야기는 이십 수년 전에 미국의 유수 병원에 근무하는 한 한인(韓人) 의사의 간증 테이프에서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는 육이오 당시 전사하고 자신은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체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그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 혼자 힘으로 자녀까지 양육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어머니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오다 보니 다들 저녁 먹을 시간에 자신의 집에는 자기를 불러줄 사람도 따끈한 밥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길에 석양이 비칠 때면 우리도 이 아이들 중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