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Mar 23. 2024

인IV13 잊지 못할 말 한마디 "빙신 겉은 새끼들"

1960년대 후반, 남북관계는 참으로 엄중하였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드디어 큰 건이 하나 터졌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일성이 특수부대 소속 군인 31명을 대거 남파시켜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소위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여 바로 그 다음해부터 고등학생들에게도 기초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교련(敎鍊)이란 과목을 신설하고 각 학교에 예비역 장교들을 교관으로 파견하였다.     

이 교련과목의 하이라이트는 ‘사열(査閱, inspection)’로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1년 동안 훈련받은 것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행사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는 원래 군기(群氣)로, 단결로, 항쟁으로 유명한 학교라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런 훈련에는 당할 학교가 없을 정도라, 이날의 행사는 학교의 자존심이 걸린 행사이기도 했다.     


나는 장애인인 관계로 교련을 받을 수 없는 몸이라 교실에 남아 창밖을 내다보며 운동장에서 멋들어지게 펼치는 학우들의 사열 장면을 사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지 한 10분쯤 지났나? 누군가가 들어와 다들 교실에서 나와서  방송실에 모이라는 말을 전하고 갔다. 교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 해봐야 반에 어쩌다 명씩 있는 장애인과 그날 몸이 아파 사열장에 나갈 수 없는 학생들로서 전체 인원은 10여 명 정도 되었다.     


생전 처음 가 보는 방송실에 들어가니 구석에 조그만 골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학우들이 모여 있었다. 곧이어 우리를 이 방에 모이라 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들어보니 참 기도 안 찼다.


그놈의 이유란 것이, 사열장에서 학교 건물을 보았을 때 유리 창문 너머로 내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건물 유리창에 껌딱지 붙은 것처럼 보기가 싫으니 사열단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실에서 끌어내 한곳에 모은 것이란다. 그러면서 사열이 끝날 때까지 한 사람도 이 방에서 나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으란 친절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나는 속에서 울분이 끓어올랐다.

'야이 썅! 무슨 전염병 환자 격리시키는 것도 아니고, 범죄자 감금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이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둡고 좁은 골방 바닥에 유치장에 갇힌 잡범들처럼 오글오글 모여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다다다" 하는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쾅!" 하며 방송실 문을 열고 한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보자 대뜸 험상궂은 얼굴로 “이 새끼들 뭐야? 너희들이 왜 이 방에 있어? 네놈들이 저 기계에 손댔지?”  하는 게 아닌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안 그래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젠 이런 누명까지 씌우다니!  


사정인즉슨, 사열 도중 갑자기 마이크가 꺼져 음향 책임자인 음악 선생님이 방송실로 뛰어온 것이다.     

그분은 군악대 출신으로 평소에 음악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체육 선생님이나 교련 교관에 더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기며 학생들 앞에서 무게 잡기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군대 사열 같은 것을 하는 날이 오니 병정놀이에 오죽이나 신이 났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마이크가 꺼지는 바람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 씩씩대며 올라왔는데, 눈앞에 화풀이하기 딱 좋은 희생제물들이 한둘도 아니고 십여 명이나 "날 잡아 잡수~." 하듯 기다리고 있었으니.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송 장비에는 손댄 적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내 이 기계부터 고치고 보자. 마칠 때까지 너희 놈들 전부 어디 가지 말고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어!”     

다행히 마이크는 금방 원상 복구되었다.     


“너희들 다 나와.”

그는 우리를 복도에 일렬로 세워놓고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릴 때 철부지 아이들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빙신 겉은 새끼들 빙신 겉은 짓만 골리 가매 하고 앉았네!”     


이 경상도 방언을 알아듣기 쉽게 대한민국 표준어로 통역하면

“병신 같은 새끼들, 병신 같은 짓만 골라가며 하고 앉았네!”란 뜻이다.     


그리고는 “어금니 다물어!” 하더니 주먹 쥔 손바닥으로 병신 같은 새끼들의 아구창(‘턱’이란 뜻)을 야무지게 한 대씩 갈겼다.     


난생처음, 그것도 주먹으로, 뺨을 맞는 순간이었다.

아구창이 얼얼했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는 아리하게 가슴을 찔러오는 모욕감과 모멸감이 더 아팠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그 한마디는 내 머릿속에 자구(字句)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각인되었다.


“빙신 겉은 새끼들 빙신 겉은 짓만 골리 가매 하고 앉았네!”     

 
이 말은 곧, 나 같은 사람이 앞으로 사회에 나가 조금이라도 잘 못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 것인지를 미리 말해주는 예시(豫 示) 같은 것이었다.


                                                                                                                           will be continued...

매거진의 이전글 인IV 12 인생에 꼭 필요한 세 가지 복과 그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