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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r 26. 2024

What goes around comes a

그 일이 있은 지 2~3일 후, 한 친구가 와서 점심시간에 교정 벤치에서 음악 선생님이 나를 좀 보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점심 식사 후 약속 장소로 갔더니 그 선생님이 친절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반겼다.


나는 그분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표정근(表情筋)이 작동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야! 이거, 혼자 보기 아까운데, 다른 아이들도 좀 봐야 하는데~.'     


그러고는 나에게 빌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너무 미안하게 됐다."

"부모님이 얼마나 상심하셨겠느냐. 잘 말씀드려라." 등등.     


왜 그랬을까?

실은 그 일이 있었던 날 저녁 식사 시간,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는데 내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있는 것을 본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 뺨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아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당장 아버지 입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야이 썅! 뭐이 어드르고 어드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앞으로 제 놈의 새끼 중에 그런 새끼 한 놈도 안 나오는지!”

그것은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의 한 맺힌 절규였다.


아버지는 다음날 바로 교장실로 찾아갔고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찾아와 이렇게 사과하는 걸 보면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께 무얼 요구했는지 짐작이 간다.

아버지는 당시 2급 공무원이었다. 1960년 대에 2급이라면 지금의 2급보다 훨씬 높은 고위직으로 인사(人事) 시에는 대통령이 직접 낙점하는 그런 자리였다.


선생님은 그날 자신의 언행을 뉘우쳐서 나에게 사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힘에 굴복하여 아버지께 빌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선생님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때 그 학생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장애인 학생들만이라도 함께 불러 사과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내 눈엔 그런 선생님이 무척 비굴해 보였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사람...




그로부터 55년이 지났다.

지금쯤 선생님은 그때 그 일을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그분의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만한 일쯤은 아예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뱉은 그 말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50년도 훨씬 더 전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본인의 명예가 키보드 위에 놓인 제자의 손끝에서 달랑거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말이란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소리()는 파(波)의 진동이 끝나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지만 사람의 말(言)에는 기(氣)와 혼(魂)이 실려 있어 한 번 뱉은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내  입에서 달려 나간 독화살 같은 말 한마디는 금방 상대방의 고막을 울린 후 가슴 판에 새겨지고, 또다시 그의 입을 통해 파발마처럼 달리며 온 세상을 돌고 돌다가 언젠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


-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


이 말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뜻의 사필귀정(事必歸正) 및 인과응보(因果應報)에 해당하는 서양 속담인데 문맥으로만 본다면 필자가 기술한 '말'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낸 듯하다.


그렇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내게로 달려온다.

그리고, 가해자는 쉽게 잊어도 피해자는 결코 쉽게 잊지 않는 법.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된다.




* 에필로그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선생님을 욕보이기 위함이 아니요,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말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 위함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남들로부터 두 번 다시 그런 치사한 말 안 듣기 위해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고 한 번씩 내 성질대로, 내 본능대로, 내 마음대로 해 보고 싶을 때마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말 한마디는 내 심신을 가다듬는데 큰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비록 선생님은 내 마음 밭에 독초의 씨앗을 뿌렸지만 그 씨앗이 자라나면서 점차 약초로 변해갔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에무슨 악감정이 남아 있겠는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선생님도 한참 젊은 나이에 순간적으로 혈기를 못 참아 실수한 게지." 하며 빙그레 웃음이 나올 따름이다.

 

역시 사람은 약간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표제사진 출처:

위의 사진은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를 주제로 만든 세계적인 광고디자이너 이제석의 작품을 필자가 편집한 것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포스터를 한 장 만들어

건물 기둥에 돌려 붙여 그 문구의 진리를 너무나 멋지게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2009년 6월,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뉴욕 페스티벌(New York Festivals)에서 공익광고 부문 '그랑프리'를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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