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한밤중에 아내가 내 방에 들어와 나를 깨우면서 "여보~, 또 시작이다." 한다.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아내가 배를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내며 옆으로 누워 있다. 폰을 열어 보니 0시 30분.
"무슨 약 먹었어?"
"게보린에 부스코판. 여보, 등줄기 좀 쓸어줘. 배도 배지만 등어리가 땡겨서 못살겠다.“
수년 전, 똑같은 증상으로 한밤중에 배를 움켜잡고 심한 복통을 호소해서 다음날 초음파를 해 보니 전에 없던 담석이 많이 생겨 있었다. 시점을 따져보니 심한 갱년기 장애로 여성호르몬 투여 후부터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호르몬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그땐 게보린 투여로 20분 만에 통증이 가라앉았다.
다음 해 또다시 같은 증세가 나타났을 땐 게보린 두 정이 필요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과 주치의와 상의했더니 통증 올 때 먹으라고 약을 지어주었다.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에 통증이 왔을 때 먹여보니 그 약이 전혀 듣질 않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내과 전문의가 지어준 약이 듣지 않다니 황당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게보린에 부스코판을 먹였다.
이걸로 안 들으면 응급실에 데려가야 했다. 다행히 1시간 만에 통증이 멎었다.
그 이후, 통증이 오는 빈도가 점점 증가했지만 일단 한 번 가라앉고 나면 몇 달은 아무 일 없었는데 이번엔 이틀 연달아서 온 것이다.
전날은 다행히 20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이번엔 한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다.
내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팔에도 쥐가 나려 한다.
전날 스시집에서 아내가 너무 잘 먹는다 싶어 내가 말렸던 생각이 나 최후의 요법으로 대만에서 사 온 강력 소화제 ‘강위산强胃散’을 먹였다.
한 30분쯤 지나니 조금 났다면서 아내가 미안했던지 "내 방에 갈게요." 하면서 나간다.
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7시.
후다닥 일어나 아내 방에 가보니 녹초가 되어 누워있다.
"어때?"
"아침 6시까지 아프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수술하자.“
내과 주치의 vs 의사 남편
나는 그날 출근해서 아내의 주치의에게 외과로 넘겨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수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통증의 성격으로 보아 꼭 담낭이 원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수술한다 해서 지금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리란 보장이 없고,
초음파상 아직 담낭 벽이 두꺼워지지 않았다 하니 수술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러면서 그는 다시 처방을 낸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박했다.
'이미 위내시경 몇 번 해 보아서 통증의 원인이 위나 십이지장이 아니라는 것 확인했고,
통증이 올 때 등줄기로 뻗치는 referred pain(연관통증)이 있고,
배를 눌렀을 때 압통을 호소하는 자리가 담낭 부위와 일치하며,
이런 일이 계속되어 담낭에 섬유화가 진행되면 복강경 시술도 어려워지니 지금 수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아내는 외과로 전과하여 수술 하기로 결정했다.
꿈
수술하기 사흘 전 새벽, 나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고 몸에는 진땀이 배어있었다.
지금껏 아내가 꿈속에 나타난 적은 거의 없는 데다 내 꿈은 개꿈이어서 깨고 나면 스토리도 잘 기억 안 나는데, 이날은 너무나 또렷이 아내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불행한 일을 당하기 전, 마치 예고라도 하듯 자신이나 아내의 꿈에 안 좋은 일이 나타나는 게 연상되었다.
그런 시나리오에선 대부분, 중요한 일로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꿈자리가 사나우니 가지 말라고 아내가 결사적으로 말리면 남편은 "무슨 그런 미신 같은 소리?" 하며 무시하고 갔다가 사고나 죽음을 당한다.
이런 요사스런 내용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바로 명상하는 자세로 돌입해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한 삼십 분쯤 지나 마음이 가라앉자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골똘히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내 마음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장고 끝에 결정했다.
한 번 더 이런 불길한 꿈이 나타나거나 이 불안감이 이틀 동안 지속되면 수술 취소하기로. 하지만 그런 꿈은 다시 꾸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감도 점점 사라져 예정대로 수술하기로 하고 수술 전날 입원시키기로 했다.
입원 전날 저녁 식탁.
"여보, 오늘 문득, 내가 수술실에 들어갔다 마취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말인데,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들어놓은 적금, 보험, 연금 통장들 하고 패물은 장롱 속 비밀 서랍에 넣어 두었으니 열쇠로 열고 꺼내면 돼요."
"어 허이~ 무슨 그런 헛소릴!“
"사람 일이란 게 모르잖아요. 그러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그런데, 내가 죽는 건 하나도 겁이 안 나는데 우리 아이들 생각하면 걱정돼서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아니, 다 큰 아이들이 왜 걱정이 돼? 그보다 남편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야?"
"호호, 당신은 오히려 걱정이 안 돼요. 당신은 몸이 불편하니 혼자서는 못 살아 빨리 새장가 가야 할 거고,
당신같이 능력 있고 좋은 남자는 얼마든지 좋은 여자 만날 거고, 또 당신은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잘 살 거예요. 그리고 당신 빨리 장가 간다고 나 하늘나라에서 원망 안 할 테니 염려 놓으셔! 그런데 당신 새장가 가면 우리 아이들이 불쌍해서 어쩌누! "
그러면서 이어 하는 말이
"안 그래도 남자가 나이 들수록 헌 마누라 앞에서도 고개가 숙여지는 법인데, 내 주변에 보니까 늘그막에 젊은 여자하고 새장가 간 남자, 마누라한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살면서 재산은 모조리 새 마누라 앞으로 해 놓고, 아이들 앞으로는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기더라. 그러니 당신은 제발 그라지 마소. 재산이래야 개뿔도 없지만, 그래도 그 반은 아이들 앞으로 남겨주소. 약속하시라요!“
"어허이~ 이 할망구가 노망이 났나? 별 헛소리를 다하고 앉았네. 마~ 밥이나 무우라, 츳츳."
현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다고 집을 나서다 나도 모르게 아내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열쇠는 어디 두었지?"
표제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