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의 겨울
겨울에 눈이 있어서 참 좋다. 꽃도 없고 산과 나무도 갈색 톤으로 가라 앉아 보이는 풍경이 지루해 질 때 쯤에 하얀 눈이 내려 온 세상을 백설의 나라로 변신시켜버린다.
눈이 오면 아이들이나 강아지들만 신나는 것이 아니라, 겨울 눈 산행을 손꼽아 기다리는 산행객들도 신이 난다.
월요일 강원도 내륙에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산행 계획에 들뜨기 시작했다. 화요일까지 눈이 온다고 해서 하루를 더 참고, 드디어 수요일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두 시간을 달려 대관령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자리를 골라 주차를 하고 스패츠와 아이젠을 착용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들머리를 향했다.
그런데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남편이 백설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느라 자꾸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눈이 그치면 파란 하늘은 당연한 선물이다. 우리가 하루를 더 기다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흰 눈과 파란 하늘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산에 오르지않고 그냥 멍하니 보고 있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선자령을 처음 간 때가 2008년이다. 오대산 첫 눈산행이 2004년이니까 좀 늦게 선자령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고 코스가 힘들지 않은 편이라 그 뒤로는 거의 매년 찾은 것 같다. 선자령은 대부분 겨울에 찾았다. 눈만 오면 선자령 가자! 라고 할 정도로 우리 부부에게 선자령 눈 산행은 만만하게 즐기는 겨울 산행이다.
<대관령마을 휴게소 - KT 중계소 - 세봉 전망대 - 선자령 정상 - 하늘목장 삼거리 - 쉼터 - 제궁골삼거리 - 국사성황사 - 대관령마을 휴게소>가 이번 산행 코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면 좋을 듯한 나무들이 줄지어 섰다. 반짝 반짝 트리등을 달고, 빨갛고 파란 예쁜 방울을 여기 저기 달아보고 싶다. 그렇게 장식해 놓으면 혹시 숲 구석구석에서 키 작은 산타할아버지들이 빨간 옷에 긴 수염을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빈 가지마다 하얀 눈이 쌓여 나무가 풍성해졌다. 등산로도 하얀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설경은 침엽수가 더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활엽수는 잎이 다 떨어져 빈 가지만 남지만, 침엽수는 겨울에도 잎들이 빽빽하게 모여있어서 눈이 많이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만난 숲의 변신이 무궁무진하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속도내어 걷는 산행객들은 거의 없다. 설경을 카메라에 휴대폰에 담느라 산행객들의 발걸음이 더디다.
무슨 야생화일까? 하얀색 핫도그가 되었다.
KT 중계소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은 약간 내리막이다. 비박을 한 사람들이 눈썰매를 준비해왔는지 하산길에 속도를 즐기고 있다. 나중에 뒷 사람이 준비하는 것을 보니까 눈썰매에 커다란 배낭을 얹고, 그 위에 올라앉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고도가 높은 이곳은 눈이 내린 양이 적었을까? 아니면 바람에 다 날린 것일까? 눈이 쌓인 게 아니라 상고대 같다.
세봉에서 본 강릉은 눈이 내린 흔적이 없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은 눈이 안 오고, 서쪽만 눈이 내린 것 같다.
다시 쌓인 눈이 많아진다.
작은 주목 묘목들도 모두 눈 속에 포복 중이다. 잘 자라서 큰 숲을 이루어주길 바란다.
능선에 올라서면 선자령의 상징과도 같은 풍력 발전기가 보인다. 바람이 늘 많은 곳인데, 바람이 불지 않아 대부분의 풍력발전기가 멈추어져 있다.
사람과 문명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멋진 한 장면. 사람이 포인트다.
시야가 탁 트인 너른 들판에는 눈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이곳을 지나면 선자령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첫돌은 지났을까 싶은 아기가 부모와 같이 비박을 했나보다. 아기가 기억이나 할까? 아마 몸은 기억하지 않을까. 아주 튼튼하게 잘 자랄 것 같다.
선자령 정상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정상석이 아닐까. 앞에 있는 통나무에 올라가서 인증샷을 멋지게 찍을 수 있게 준비해 둔 센스가 돋보인다.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서 따뜻한 커피와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진다. 간이 의자를 준비해 왔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인데다 다져지지 않아서 균형잡기가 어려웠다.
하늘 목장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시야가 탁 트여 풍력발전기가 있는 멋진 전망을 담을 수 있는 좋은 위치다.
경사진 내리막길이 끝나면 널찍한 임도가 기다리고 있다. 풍력발전기 관리용 도로도 되는 셈이다.
하늘 목장 삼거리를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여인의 모습 같은 나무가 있는데, 눈이 쌓여 그 형체가 더 뚜렷하게 보인다.
12시가 지나자 나뭇가지는 쌓인 눈보다 녹아내린 것이 더 많이 눈에 띤다. 바닥도 눈이 녹아서 질퍽해 졌다.
하얀 눈 속에서도 꿋꿋한 속새 밭이다.
낙엽송과 자작나무 반반숲이다. 햇빛이 비친 쪽은 녹고, 그 반대쪽은 눈이 그대로 있다. 나무도 반반이다.
쉼터에 쉬려고 했는데 개울에 수량이 많아서 징검다리 건너기가 위험해 보였다. 할 수 없이 그냥 통과한다.
눈이 비로 떨어져 내린다. 눈뭉치가 툭 떨어지기도 해서 눈이나 비보다 더 요란하다. 머리에 목에 배낭에 미처 대비할 새도 없어 얻어맞으면서 즐겁게 걷는다. 숲길을 나갈 때 쯤엔 나무에 쌓인 눈 구경하기가 어렵겠다싶다.
국사성황사에서 굿을 하는지 자바라 소리가 요란하다.
포장도로라 눈이 다 녹아서 아이젠을 벗고 스틱도 접고 가볍게 걸었다.
아침에 예뻤던 설경이 감쪽 같이 사라졌다. 다시 늘 보던 겨울 풍경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다시 눈소식이 들리면 선자령 가자! 하고 배낭을 챙기고 나설 것 같다.
총 거리 12km, 천천히 시니어 산행팀 답게 5시간 50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