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킹 데이

4

by 원초이

차 라디오에서 이 시각 교통상황이 흘러나왔다. 요섭은 슬며시 다른 주파수를 검색했다. 혜리의 심사를 고려할 때 차와 관련 없는 주파수가 필요했다.

“어떻게 한마디도 못해?” 혜리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뭘.”

“그 넥타이.”

“약 먹었나봐. 치어죽을 뻔했어.”

“뭐라도 한마디는 해줘야지.”

“너무 빨라. 그렇게 빠른 놈은 정말... 카레이서가 아닐까. 그런데 차에 기름이 없네.”

정말이었다. 요섭이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사실 주유소는 요섭과 혜리가 주차 걱정 없이 들르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파트 주차장도 주차가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줄을 설 수 있었다. 요섭은 운전대를 툭툭 치며 흥얼거렸다. 어쨌든 차를 뺄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이었고 그 마음이 혜리에게도 전해졌으면 했다. 장인을 모시러 가는 길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셀프주유소는 저렴한 가격에다가 차주에게 그럴듯한 장악력을 제공했다. 가장이 가정을 먹여 살리듯 손수 펌프를 붙잡고 기름이라는 밥을 먹여주는 것과 같았다. 요섭은 혜리의 시선이 미치는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보이지는 않게끔- 믿음직스러운 포즈를 잡았다. 주유를 마치고나서도 평소보다 과감하게 펌프를 뽑아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가 운전석에 자리를 잡자 혜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왜 까불어.” 그는 못 들은 척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는데 혜리가 주유소 벽에 내걸린 세차 할인 현수막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래도 원래 아버지 차니까 좀 씻어주자.”

차가 세차 동굴로 들어가면서 워시, 샴푸, 린스, 드라이의 순서가 이어졌다. 혜리는 각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살피는 모습이었다. 요섭은 혜리가 방금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차뿐만 아니라 집에도 장인의 돈이 보태졌으니 그를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요섭은 장인의 돈에 코가 꿰인 송아지 신세처럼 자신이 처량해졌다. 혜리가 고삐를 당기듯 그의 팔을 쿡쿡 찔렀다. 전방에 빛줄기가 보였다. 동굴 끝에 타월을 든 인간의 형체가 어서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정체를 드러냈다. 팔을 와이퍼처럼 돌리면서 차에 남은 물기를 닦아줬다. 출발! 남자가 손바닥으로 차 지붕을 두드렸다.

도로로 나오자 한낮의 햇빛이 말끔한 유리를 통해 차 안에 번졌다.

“놀러가는 길이면 좋겠다.”

혜리의 뜻밖의 말에 요섭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가 말을 거뒀다.

“아니지. 개고생이지. 주차하기도 힘들고.”

그 말에 요섭은 그녀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는데 역시나 였다.

“어디가나 자리가 없구나 없어. 차도. 사람도.”

혜리가 평소에 타령조로 흥얼대는 말이었다. 그녀가 자궁을 떼어냈을 무렵부터인 것 같았다. 그녀는 주차 공간에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요섭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도 만만치 않게 주차에 대한 시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리의 증세는 새댁과의 다툼 이후 심해졌다. 요섭이 차에 시동을 걸다가 혜리의 주차 걱정으로 외출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아반떼는 허구한 날 서있는 신세였다. 흥미롭게도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다른 차들도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았다. 경조사가 아닌 이상 꿈쩍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주민들은 자동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일터를 오가는 셈이었다. 버스, 지하철, 자전거. 가끔 택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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