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페이지
가끔씩 엉뚱한 춤을 추던 너의 모습을 기억한다. 활짝 미소 지은 너의 얼굴의 그 화사함을 기억한다. 모순적이게도 너를 지우려 노력하면 할수록 너는 더 짙어져간다. 흰 와이셔츠에 든 얼룩처럼, 계속해 문질러 닦아내보아도 점점 더 물들어갈 뿐이다.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게 사람과 관련된 일이든, 무엇이든. 시간이 제 힘을 내지 못 한다고 생각된다면 아직, 필요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흰색 와이셔츠의 얼룩 또한 시간이 지나가면 점차 신경 쓰지 않게 될 흔적이다. 아직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그 흔적이 거슬리는 탓에 당장에 새 와이셔츠를 사려함은, 감정적인,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점차 흐르는 시간이 얼룩을 옅게 하지는 않지만은, 남들은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볼 수 있는 그 얼룩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지금과 달리 그랬었지 라는 말로 사각 문지르고선 지나갈 수 있는 때가 언젠가는 될 것임에. 그럼에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한다.
얼룩의 존재는 모순적이게도 얼룩을 잊기 위한 가장 큰 원동력이자 동시에 나를 망가뜨리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너를 잊기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매순간이 사무치게 고통스럽지만은 당신을 잊어야한다는 그 생각이 계속해서 너를 다시 잊어내기를 다짐하게 한다. 너를 잊으려 수없이 반복해도 흉터와 같이 당신은 나의 어딘가에 짙게 남아 언젠가 지나가는 때에 나의 기억 속에서 다시금 상기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온전히 지워낼 수 없다. 수없이 반복하여도,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에서야 난 얼룩으로 물든 셔츠를 옷장의 구석에 넣어둘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망각을 준비하기 위하여.
무언가의 행위를 반복함에 있어서, 특히 망각을 위한 반복에 있어서 임계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매일의 반복이 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각자 아프게 기억되고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 월, 년을 보내다보면 언젠가에 임계점이 다가온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반복을 하게 되는, 그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아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상태로 전환된다. 그렇게 우리는 끝없는 반복을 이어가게 되면서도 그러한 반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완전한 망각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복은 또 특별한 성질을 지녀 그 행위를 멈추게 되고 시간이 또 흐르게 된다면 개인이 열심히 쌓아 올려온 반복의 역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간단한 예로 이전의 애인을 잊지 못한 이가 다른 사람을 만나 과거의 애인에 대해 생각조차 않다 헤어짐 이후 다시 이전의 애인을 떠올리게 되듯이 말이다. 물론 물들어버린 셔츠의 얼룩이 다시 이전만큼 진해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얼룩의 존재가 떠오르게 될 것을 경계하려고 한다.
이제야 임계점에 도달한 나는 당신과의 모든 역사를 고이 접어 나의 옷장 안 구석으로 밀어두어 놓았다. 끝이 없을 줄 알았던 반복이 끝나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은 내가 머지않아 당신을 완전히 망각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너무나도 많은 후회가 남은 순간들이었다.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별한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너무 서툴렀던 나의 마음을 받아준 당신에게, 그리고 그런 나의 모든 후회를 사랑으로 생각해준 그대에게 꼭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감사 인사조차 당신에게 실례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저 잠시 생가에 잠기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런 당신을 잊어내기까지도 참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조금은 성숙해진 것일까. 누차 네가 나에게 말했던 어린 나의 모습이 조금은 변화한 것일까. 이제 와서 다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지만은, 글을 적어 내려가는 이 와중에도 쓴 웃음이 나옴은, 내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겠지.
반복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역사는 사무치게 아프기도 하여서 이미 의식할 수 없는 수준의 반복에 다다른 이들은 그 역사를 다시 의식하게 됨을 꺼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하나의 역사가 끝나간다. 안녕, 나의 첫사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