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한 실내, 세련된 인테리어, 눈길을 끄는 다양한 식재료들. 백화점과 대형마트 식품관의 모습이다. 깔끔하게 손질되고 중량에 맞춰 정확하게 10원 단위까지 가격이 매겨져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온갖 야채와 과일. 더위와 추위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원하는 물건을 쇼핑할 수 있는 대형마트는 이제 우리 생활공간의 일부인 듯 싶다.
대형마트와 달리 아파트 내 재래시장은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진 나물들. 시금치, 취나물, 비름나물, 방풍나물, 도라지, 고사리, 더덕, 각종 버섯, 꽈리고추, 파프리카, 오이, 가지, 쪽파, 무, 배추, 감자, 고구마 없는 게 없다. 무엇보다 봉지에 무게를 달아 깔끔하게 포장되어 파는 것들과는 달리 종류별로 한가득 쌓여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정확과 실측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더미’는 문득 편안함과 여유를 던져준다.
아파트 장날, 들어서는 입구에 쪽파 더미가 가득했다. 뿌리에 흙이 묻은 채 단으로 묶여있는 쪽파는 금방 밭에서 뽑아 올린 듯 싱싱해 보였다. 친정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파전도 생각나고 겨울이 지나고 배추김치가 물릴 즈음 시어머니가 해서 보내주시는 파김치의 알싸하고 풋풋한 내음이 생각났다.
쪽파는 한 단에 5천 원이었다. 두 단 사면 9천 원에 준단다. 무지막지한 양이다. 저걸 다 사면 파김치는 물론이고 파전도 실컷 해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저거 다 다듬어야 하고 파김치는 내 실력으로 맛있게 할 자신도 없고 해서 머뭇머뭇 망설이고 있으려니 야채 가게 사장님이
“파김치 담가보세요. 요즘 쪽파 제철이잖아요.” 했다.
“하하, 파김치 잘 담글 자신이 없어서요.”
“그냥 액젓, 고춧가루, 매실액만 넣으시면 돼요. 아, 쪽파는 마늘을 따로 굳이 안 넣어도 돼요. 배추처럼 따로 소금에 절일 필요도 없고요, 파김치처럼 쉬운 것도 없어요.”
오호, 그런가? 나는 거의 90% 쪽파를 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다. 사서 담가봐?
다듬는 게 힘들 것 같은데. 그래, 그건 남편에게 해달라고 하면 되고. 음.. 고민하는 사이 야채를 사려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고사리 중국산이에요? 국산은 없어요?”
“네, 국산은 보통 제주도나 강원도에서 나오는 건데 고사리는 주로 손으로 따서 작업하는 거라 그런지 너무 비싸요. 못 갖고 왔어요.”
“아 그래도 국산을 팔아야지. 요새 누가 중국산을 먹어?”
하며 한 할머니가 고사리랑 도라지 더미를 계속 뒤적뒤적했다.
“아, 그리고 고구마가 뭐 이리 비싸? 동네 장인데 이러면 뭐 장사가 되겠어?”
할머니는 한 박스에 2만 원이라는 고구마가 비싸다며 5천 원이나 깎아 달라고 했다.
“아저씨, 이것 좀 빨리 계산해 주세요. 아까부터 기다리는데. 아, 짜증 나.”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갑자기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여기저기서 아저씨를 부르며 찾았다.
“아저씨, 이 고구마 값 좀 깎아 달라니까?”
고구마를 흥정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지고 짜증도 묻어 있었다.
“할머니, 그럼 저희는 남는 거 거의 없어요. 여기 아파트 모두 단골이라 정말 최소 마진만 붙이고 파는 거예요.”
과연 고구마는 어제 근처 마트에서 내가 본 한 상자 가격과 언뜻 비교해 보니 훨씬 값이 쌌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잠시 생각하던 사장님은 2천 원을 뺀 값에 고구마를 가져가시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요기 아파트 305호로 배달해 줘요.”
돈을 지불하며 배달 요청까지 하고 돌아서던 할머니는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동네 장산데 저 총각은 맨날 깐깐하게 군다니깐. 성격이 원.. 그러니까 허구한 날 저러고 살지.”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나에게 들렸던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야채 가게 사장님에도 들렸을까 봐 나는 얼른 사장님 쪽으로 돌아봤다.
할머니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사장님은 할머니 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쪽파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야채를 사고 돈을 지불하며 한참 동안 북적였다. 손님이 다소 뜸해지자 야채 가게 사장님은 옆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았다. 사장님의 기색은 다소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아저씨, 물건을 아까 많이 파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아, 참. 죄송해요. 쪽파 사신다 그러셨지요?”
“아, 네. 파김치 한번 해볼게요.”
말은 하면서도 나는 결국엔 파김치를 담그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냥 샀다.
아저씨는 한 번 더 자세히 파김치 담그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파전도 홍합과 새우를 다져서 넣으면 감칠맛이 난다는 팁까지 덧붙여주었다.
요리에 재주가 없는 나였지만 한 번 해봐? 파김치를? 하는 의욕이 마구 솟아올랐다.
“아까 너무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서 좀 힘드셨겠어요.”
“손님이 많아서 장사가 잘되면 좋지요. 그런데 손님 중엔 제가 야채 장사를 이렇게 하니까 야채 값 정도로밖에 나를 취급 안 해요. 야채가 사실 다른 무엇보다 싸잖아요. 식당에서 비빔밥에 들어가는 고사리는 대부분 중국산이데 그곳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먹으면서 이런 데 오면 꼭 저렇게 중국산이 어떠느니 국산이 어떠느니 말해요.”
“저도 매일 새벽 야채 도매시장에 가서 사 올 때 어떤 날 특정 야채 가격이 너무 비싸면 현실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거든요. 손님들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냥 저에게 한마디 해보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에는 중국산이라도 그걸 사요. 필요하면 사야 하니까요.”
“저도 남는 게 있어야 하는 장사인데 아파트 장은 주민 단골을 보고 하는 거니까 마진을 턱없이 붙이진 못해요. 그런데도 무조건 값을 깎고 보자는 생각으로 나오니까요. 손님들은 무심코 한마디 던지지만 저는 그때마다 그러려니 해도 기운이 빠지곤 해요.”
마침 손님이 뜸해져서인지 아저씨는 두서없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다. 받고 싶은 것도 비슷하고 듣고 싶은 말도 비슷하고 상처받는 지점도 비슷하고. 물건을 많이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어도 오늘 사장님은 기분이 다소 우울할 것 같았다.
나는 쪽파와 고구마 한 박스, 무, 파프리카를 더 샀다. 고구마는 원래 가격 2만 원에 그냥 달라고 했다.
‘한 박스 팔아 봐야 얼마 남지 않아요. 못 판 거 썩어서 그 비용까지 계산하면 남는 게 많지 않다’는 사장님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엊그제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에 6천 원을 고민 없이 지불했는데 고구마 한 박스에 2천 원을 깎으면 내가 너무 볼품이 없을 것 같았다.
고구마는 간식으로 몇 개 삶고 파프리카는 내일 아침 샐러드에, 오늘 저녁엔 파전...
나는 갑자기 해야 할 요리며 일들이 생각나 서둘러 자리를 떴다.
소아 의료 붕괴가 화두가 된 지 오래되었다. 한 소아과 전문의의 글이 생각난다.
절대 출생아 수는 낮아졌지만 사소한 이상에도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는다고 한다. 아이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병원을 찾는 빈도수로 보면 진료 양의 측면에서는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왜 하필 이제야 문제가 되는가?
아이의 보호자인 부모들로부터 받는 대접(?), 소아과 의사에 대한 보호자들의 시선 등으로 인한 상처가 의외로 크다는 고백이었다.
‘실제로 소아과 의사에 대한 폭행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부모인 보호자들로부터의 폭언과 무례함은 상상 그 이상일 거’라는...
‘얼굴에 손이 직접 와닿지 않았다 뿐이지
정말 뺨을 맞는 듯한 기분이 들게끔 말을 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내 새끼가 아프다는데, 부모 마음에 걱정돼서,
한 마디만 붙이면 온갖 무례와 갑질과 폭언 폭행이 용인되는 현실’이라고...
그녀는 토로했다.
몰랐던 현장의 목소리였다.
‘아이와 관련하여 뭐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들면 시작되는 대면 혹은 온라인 갑질,
‘애가 먹을 건데’가 포함된 음식점 리뷰나 ‘애가 가지고 노는 건데’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키즈카페 사장님의 폐업 이야기를 만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라는 이야기에도 사실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소중한 아이, 두말하면 잔소리다.
지금처럼 아이 키우기 힘든 현실에서 어렵게 낳아서 키우고 있는 내 아이는 너무 소중하다.
그러나 ‘내 아이는 소중하다’는 그 프레임에 갇혀버리는 순간 우리는, 부모는 그 너머의 것들은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아래서 소아과 진료 일회당 진료비는 몇천 원이다.
다행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그러나 현실적으로 몇천 원이라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소아과 진료비는 그대로 의사의 진료에 대해 보내는 부모의 존중의 무게와 비례한다고 그들은 느끼는 것이었다.
싸구려 서비스라는 느낌, 몇천 원짜리 정보를 제공하는 존재에게 부모들은 존중의 눈빛을 보내지 않으며 그것은 그대로 소아과 의사의 자괴감으로 연결되고 그들이 매일 견뎌야 하는 자괴감이 우리나라 현재 소아 의료 붕괴의 핵심 이유 중의 하나라는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의외였지만 충분히 공감이 갔다.
식재료를 재배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우리네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운반하고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고 몇천 원에 불과한 진료비를 내고 나오지만 소아과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없으면 내 아이의 건강과 안전이 위협을 받는다.
그 과정의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돈으로 값이 매겨지는 현실, 그 속에서 돈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는.
주고받는 돈의 무게만큼, 딱 그만큼만 우리는 사랑과 존중을 소비하는 건 아닐까?
‘소아과 진료수가 현실화’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그냥 아이들이 좋아서, 어린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이끄는 대로 ‘소아 의료’라는 빛나는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신선한 야채를 사람들 식탁에 올려주는 사람들, 주식 투자도 아니고 부동산 투자도 아니지만 정직한 장사로 돈을 벌려는 야채 가게 사장님들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돈의 무게로, 돈의 양으로 모든 게 움직인다는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을 굳이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래도 가끔은 그런 현실에 눈 부릅뜨고 대거리라도 하고 싶다.
5천 원어치 쪽파를 다듬으며
쪽파 김치가 우리 집 식탁에 오르기까지에 더해진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애정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