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은상 - 이은희
천상에 계신 아버지께.
아버지가 이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10년.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으신 걸 보면 그곳에서 엄마를 만나 생전에 못해 봤던 새로운 일을 하느라 바쁘신가 보네요. 두 분의 부재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지만 제 몸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는지 장인과의 사이가 각별했던 김 서방은 오늘 아침에도 무심결에 “어이구, 장인어른!” 하며 제 두 손을 덥석 잡더라고요. 신문 읽는 제 모습이 영락없는 아버지라나요. 이렇게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면 그 옛날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학교로 보내주셨던 그림엽서들을 꺼내 보곤 합니다.
70여 년 전 당시에는 드물게 불어를 전공하신 아버지는 불란서 유학을 다녀오기 전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다죠. 그러나 손자 볼 욕심이 크셨던 할머니는 결혼을 재촉하셨고 수차례 맞선 끝네 한눈에 반해 운명처럼 만난 엄마와 결혼하고 제가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꿈은 유예되었다죠. 그런데도 불란서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신문 지면에 불란서를 소개하시던 아버지께 드디어 유학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프랑스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꿈에 그리던 불란서로 공부하러 가시게 되었죠. 불란서 특파원도 겸하게 되어 학비는 프랑스 정부에서, 가족들의 생활비는 근무하시던 신문사에서 받는 좋은 조건으로요.
프랑스에 가셔서 새로운 생활 적응에도 바쁘고 세계 곳곳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기 벅찬 가운데도 아버지는 자주 취재 가신 장소의 그림엽서를 우리 학교로 보내주셨지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외국에서 엽서를 보내주시는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요. 빅토르 위고의 생가에서 보내신 엽서를 받고는 《장발장》과 《노트르담의 꼽추》를 읽고 니스 해변이나 알프스에서 날아온 엽서를 보고는 프랑스를 여행하게 될 날을 꿈꾸며 《지리과부도》를 펴고 지명을 확인하기도 햇지요. 그림엽서 속의 장소는 같은 반 친구들에겐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저런 책을 찾아 읽게 만들어주었고 다음엔 어디에서 엽서가 날아올까 함께 기다리곤 했답니다.
그때는 우표수집이 유행이어서 희귀한 우표를 구하기 위해 외국인들과 펜팔을 맺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불란서에서 온 엽서에 붙어 있던 다양한 우표는 우리 학교 우표 수집광 선생님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어요. 그냥 달라고 하기엔 미안해서인지 교무실로 저를 불러 다른 나라의 우표나 우리나라 기념 우표와 바꾸자는 선생님들도 계셨어요. 우표를 떼어가는 대신 당시엔 보기 힘들었던 세모 모양의 외국 우표나 우리나라의 동식물 시리즈 우표를 주셨지요. 선생님께 받은 우표는 다시 친구들과도 교환하여 우표를 통해 우정도 쌓고 이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아버지께 편지 보낼 때는 우체국에 가서 무게를 달아 요금에 맞는 우표를 붙어야했지요. 이때 선생님과 교환한 국내 우표들이 유용하게 쓰였어요. 아버지는 생활불어를 익히기 위해 공원에 자주 갔다고 하셨지요. 외로움에 지쳐 벤치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노인들은 낯선 이방인이 다가와 말을 걸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훌륭한 개인지도 선생님이 되어주었다고요. 아버지는 제가 보낸 편지 속 사진을 꺼내 가족 얘기도 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우표를 보여주며 한국 소개도 하셨다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을 거는 용기도 존경스러웠고 아버지의 불어 실력을 높이는 데 제 편지가 한몫했다고 하셔서 뿌듯했어요.
제가 보관하고 있는 엽서엔 우표가 모두 떼어져 있어도, 보석으로 장식한 모피 베레모를 쓰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크고 긴 코의 프랑스 국왕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에 초대하여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완성하도록 후원하여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국왕 프랑수와 1세였지요. 무엇보다도 1518년 블루아 성에 방대한 왕실 도서관을 설치하고 인문주의 학교와 도서관 창설에 힘쓴 왕이라고 하여 어찌나 반가웠는지요. 우표에 대한 기억을 통해 프랑수아 1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어 우표 한 장에까지 마음 써서 보내주셨던 자상한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불란서에서 날아온 엽서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깊은 사랑을 받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었듯이 저는 엽서를 통해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살리곤 합니다.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딸을 사랑해 주실 분이란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시는 아버지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2022년 9월 2일
은희 올림
2022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일반부 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