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페이스메이커

by 현도현

[꿈꾸는 페이스메이커]


친구가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그는 능력이 모자라는 러너였다. 페이스메이커가 너무 빨리 달리면 주자가 따라가지 못해 실패하게 되고, 너무 늦게 달리면 장거리 레이스에서 주자의 리듬이 무너져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는 주자보다 모자라는 능력으로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했다.


IMF 후유증으로 다니던 회사가 매각되어 퇴사를 결정하고 재취업을 고민할 때, 인테리어 사업하던 친구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자금난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월급쟁이 하며 한 푼 두 푼 모았던 적금 깨고, 대출받아서 육천만 원을 마련하여 투자했다. 신용불량에 걸려 대표를 맡을 수 없던 그를 대신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까먹었던 사무실 보증금으로 이천만 원 보충했다. 카드빚과 미납세금, 외상값 이삼천만 원을 갚았다. 노트북, 고급 디지털카메라 등 그가 갖고 싶어 하던 집기류 몇 구매하니까 순식간에 투자금이 바닥났다. 월급쟁이 십 년 모아야 가능한 돈이 한 달 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사업이 쉽지 않겠다 싶은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턱을 조이고 있던 급한 불 끄고 나면 안정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영업망으로 제시했던 리스트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문제는 카드빚 때문에 묶여있던 한도가 풀리자 룸살롱을 두려움 없이 다녔다. 영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당장 결과도 나오지 않는 영업을 핑계로 고급 술집을 드나들며 탕진했다. 그동안 목말랐던 술을 들이붓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두 달 지나고 나니까 카드값이 또 밀리기 시작한다. 다시 천만 원을 가져다가 메꾸었다.


마라톤 출발선에서 그때 일을 떠올리는 까닭은 사업이든 인생이든, 마라톤 출발선과 닮았다. 비가 세차게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의를 입고 출발선에 서서 완주를 다짐한다. 중랑천을 왕복하는 우중 러닝이다. 하프 마라톤이지만 일기가 좋지 않아 컨디션 난조를 겪을까 봐 천천히 달리기로 마음을 다졌다. 비가 내리는 험난한 길에서 응원군이 되어 줄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했다.


2km 정도 지날 때쯤 동반 러닝 하던 두 사람의 페이스가 나보다 약간은 빠른 듯하지만 안정적이다. 바짝 따라붙었다. 한참을 달려도 자세가 반듯하고 든든하다. 흥청망청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바람막이 삼아 뒤꿈치만 따라붙었다. 그들을 나의 페이스메이커로 임명했다. 가끔 속도를 늦출 때도 있었지만, 앞서지 않고 그를 따라 늦췄다. 페이스를 잘못 쫓았다가 실패한 경험을 상기하며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기로 했다.


결승점 4km를 남기고 그들이 질주한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다. 그들이 내 곁을 벗어나 버린 셈이다. 좀 야속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행보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동안 페이스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달려오던 관성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 1km를 남기고 뒤에서 아가씨 둘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명랑하게 달려와 앞지른다. 다시 힘을 내어 그들을 따라붙었다. 좀 힘에 부쳤지만,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을 페이스메이커로 정하고 달리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 덕분에 마지막 페이스를 더 빨리 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가뿐한 레이스여서 결승선을 지났는데도 지치지 않는다.


사업에 투자하고 석 달 지날 무렵,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자금은 온데간데없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레이스를 멈췄다. 내가 믿었던 그의 영업리스트는 호객용에 불과했다. 사무실 보증금이며, 집기류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몸만 홀랑 빠져나왔다. 큰 꿈으로 맞섰던 첫 레이스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나중에 사무실 옮길 때 보증금 빼주겠다는 약속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앞서 달리던 나의 페이스메이커는 훌륭한 능력을 갖춘 겸손한 마라토너다. 나를 속이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능력치대로 성실하게 달렸다. 나는 아무 고민이나 조건 없이 무심하게 그를 따라 무사하게 완주했으니 행복하다.


마라톤 하면서 인간이니까 기록에 욕심을 낸다. 하지만 행복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레이스였다. 내 능력치보다 높게 설정된 두 팀의 페이스메이커 덕분에 나의 능력치도 덩달아 업그레이드되어 성공한 게임이었다. 종일 비가 그치지 않는 결승선에서 주로를 되돌아보니 흐뭇한 마무리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선한 영향력을 베풀 수 있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고 싶은 꿈 하나 야무지게 챙긴다. “내가 꿈꾸는 페이스메이커는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건강하고 행복한 페이스를 위하여 묵묵히 함께 호흡을 맞춰주는 사람.”


[일 시] 2025년 9월 28일

[대 회] 동대문 마라톤(중랑천 일대)

[기 록] 1시간 51분 59초(Ha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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