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수차례 수차례 마음을 전했고,
계속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했다.
그날은 나와 아내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내가 자라온 가정 분위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형적인 가모장제라고 하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우리 아빠는 아주 귀여운 아기 같은 분이었다. 그런 귀여운 아기 같은 아빠가 전통적인 가부장 사고가 탑재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딱 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집안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집안일 및 육아는 오로지 엄마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내게 귀에 피가 나도록 말했다. "너는 결혼해서 집안일을 돕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평생 대접 못 받고 산다." 어쩌면 아빠는 외벌이로 살아가면서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게 아빠역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대에 그것은 치열했을 일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은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했고, 아내와 나 사이에는 아기가 생겼다. 아내는 임신과 동시에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입덧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아기에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도 우리 아빠처럼 외벌이 남편이자 외벌이 아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내가 일을 그만둔 이후로 나는 옹졸한 쪼잔이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왔는데 집이 정리가 안 되어 있거나, 설거지가 너무 많이 남아있으면 한숨이 푹푹 나왔다. 같이 일하는 상황도 아니고, 혼자 일을 다녀왔는데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게 쉽사리 내키지 않았다. 임신한 아내에게 설득이랍시고 부업을 같이 해보자고 한다거나, 집안일을 좀 더 열심히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 이야기겠지만, 주변에 임신한 상태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무직인 아내를 비교하기도 했고,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여성들을 대놓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 아내의 입장이라면 좀 더 치열하게 살 텐데 라는 가정법을 대입해 가며 아내가 비참해지도록 한숨을 쉬며 설거지를 해댔다.
독을 내뱉고 나면 언제나 그 독은 자연스럽게 내 심장에 퍼졌다. 내가 무능하지만 않았다면, 내가 경제적으로 부유했다면 아내에게 비수를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독을 내뱉은 뒤에는 항상 후회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경제적 불안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평생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져야 할 것만 같은 외로움이 공황처럼 들러붙었다.
그런데 아내의 배가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내 사고방식이 많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아갔다. 임신을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내에게 공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아내를 게으른 존재로 만들어가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아내의 무기력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아내를 움직이게 하려는 데에 치중했을 터, 아내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는 교회 목사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셨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일이라는 것이라고. 돌아보니 아내에게 중요한 관심사는 돈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아기를 어떻게 키울지, 아기를 어떻게 사랑할지. 아기를 어떻게 지켜낼지. 어쩌면 아기는 돈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라는 걸 아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다.
마음이 무너져갈 즈음, 하루는 아내와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우리는 울어대면서 서로의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쏟아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아내가 일하기를 바란게 아니라, 아내가 내 두려움과 외로움을 그저 이해해 주길 바란 것이라는 걸. 아내도 그러했겠지. 그제야 나의 외로움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아내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수차례 수차례 마음을 전했고, 계속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했다. 그날은 나와 아내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그 후, 아내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앞으로 소위 퐁퐁남이 되기로 결심했다.(육아휴직 때는 당연하고, 육아휴직이 끝나고도) 우리 가정이 생명을 품은 이후, 내게 달라진 게 있다면 가정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외벌이와 집안일을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다 내가 해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인생의 여정을 평생 함께 걸어가기로 약속한 사랑이기 때문에, 계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아내에게 사랑을 다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식기세척기를 구매하기 전까지는, 내가 설거지(집안일) 전부 다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 여전히 많이 반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