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그런 기분 아세요?
내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도 없을 때의
서글픈 기분 말이에요.
내가 지금 딱 그렇답니다.
나의 작고 귀여운 몸이 지금 몇 시간째
나보다 덩치 큰 그릇들 밑에 눌려서
무거워 죽겠는데도,
이 게을러터진 주인이 설거지할 생각을
안 하고 있네요.
내가 이 집 그릇 중에서 제일 귀여운 그릇이거든요.
나는 종지예요.
여기서 나는 주로 양념장과 쌈장 담당이었어요.
내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에
이미 다른 종지가 있었는데요.
우리 둘이 일을 나누어서 하면 되겠다 싶어
솔직히 너무 좋았어요.
독박으로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 집에 오기 전까지 나는
주인의 어머니 댁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오고 나서 주인이 나름 예뻐해 주긴 했어요.
원래 쓰던 종지랑 디자인이 다르니까
바꿔가면서 쓰면 기분전환이 되겠다면서
좋아하더라고요.
이 집에 왔더니 어머니 댁에 있을 때보다
좋은 점은 되게 한가해졌다는 거예요.
양념장이나 쌈장 담는 데 사용되긴 했어도
사실 별로 일할 게 없었거든요.
아주 가끔 일했어요.
고기 없이도 쌈만 잘 먹기에 바쁘려나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쌈도 귀찮다고 잘 안 먹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딱히 할 일이 없었지요.
일 좋아하는 그릇들은 나처럼 한가하면
무료해서 못 견딜지 모르지만,
나는 백수 체질로 태어난 그릇인지
안 바쁜 내 삶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 상태를 즐겼죠.
그랬던 내 삶에서 최근 몇 달 동안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어요.
나의 담당이 장 종류에서
삶은 계란으로 바뀌었거든요.
종지에다 왜 삶은 계란이냐고요?
단백질 보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주인이
날마다 계란을 삶기 시작했거든요.
껍질 벗긴 삶은 계란을 꼭 나에게 담더라고요.
계란 하나 놓고 먹기 딱 좋다면서
나를 계란 전용 접시로 임명하지 워예요.
삶은 계란이 담기니까
고추장이나 쌈장 담길 때보다 좋은 점은
일단 내 몸에 빨갛게 얼룩지는 것도 없이
보송보송하고 매끄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내 입장에서는 훨씬 좋았죠.
대신에 계란 담당이 되고부터는
매일매일 일해야 해서
쌈장이 담길 때보다 귀찮아졌어요.
그래도 삶은 계란만 살짝 담기는 것이다 보니
붉은 장종류가 담겼을 때처럼
수세미한테 박박 안 밀려도 되는 게 좋았어요.
나름 마음에 들었던 삶이
뭔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였어요.
주인이 컨디션이 안 좋다면서
자꾸 설거지를 미루는 나쁜 버릇이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큰 그릇들 밑에 깔리는 일이
자주 생겼어요.
무심한 주인은 그걸 못 보고 지나쳤어요.
내가 그릇들 중에 몸도 제일 작은 종지인데
큰 그릇 속에 쏙 들어가 끼워져 있으면
당연히 눈에 띄질 않았죠.
생각해 보면 말이에요.
차라리 큰 그릇 속에 계속 끼워져 있었다면
그나마 안전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주인이 설거지도 빨리 안 해주지,
큰 그릇들 밑에 끼어 있느라 몸은 힘들지,
계속 반복되니까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어요.
하루는,
내가 진짜 너무 힘들어서 개수대 신 님께
기도를 했었답니다.
내가 힘들었던 것처럼,
주인이 꿈속에서라도 체험 좀 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나처럼 작은 그릇이 되어서
몇 시간 동안 큰 그릇 밑에 눌려있어 봐야
얼마나 힘든지를 알 것 같았거든요.
인간들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남의 고통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개수대 신 님이 제발 내 소원 좀 들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혹시 이런 일이 생긴 건 나 때문인 걸까요?
주인이 힘든 체험하게 해달라고 소원 빌어서
그렇게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걸까요?
주인이 그릇 수북한 개수대에다
다른 그릇 하나를 더 내려놓았는데
하필 너무 세게 놓았지 뭐예요.
그릇들끼리 부딪치면서 그 충격으로
밑에 깔려 있던 내 몸이 3등분이 나버렸어요.
내가 제일 몸이 약했거든요.
엉엉...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너무 속상하고 슬퍼요.
같이 있던 다른 그릇들은 다 멀쩡한데
제일 작고 약했던 나만
더 이상 그릇이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큰 그릇들 충돌에 작은 종지만 깨졌어요!
주인이 설거지만 미리미리 해주었으면
내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잖아요.
왜 피해는 나만 봐야 해요?
게으름은 주인의 탓이잖아요.
너무너무 억울해요.
정말 당신이 너무 미워요!!!
그릇들의 주인이라면 딴 건 몰라도
우리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설거지권을 보장해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설거지권 : 식사한 후 그릇은 즉시 씻는다)
다시는 주인처럼 설거지 미루는 인간들이 없게
나같이 어이없이 깨지는 그릇들이 생기지 않게
강력한 설거지권 좀 만들어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