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랄랄라...
이제 밥을 지을 시간!
나는 일하는 시간이 정말 좋아요.
밥 짓는 내 일이 적성에 딱 맞거든요.
우리 주인은 모든 메뉴를 통틀어서
밥이 제일 좋은 사람이고,
나는 밥 짓는 게 너무 좋은 전기압력밥솥이니
그동안 우리는 찰떡궁합이었지요.
나랑 우리 주인은 서로에게 첫사랑이랍니다.
우리 주인이 이 세상에서 처음 사본 밥솥이
바로 나였고, 나도 누군가를 위해 첫 밥을
지었던 게 우리 주인이었거든요.
주인이 아직 파릇파릇 젊었을 때,
나도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상이었을 때,
우린 처음 만났어요.
우리 주인은 내가 밥솥이란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얼마나 자주 나를 사용해 주던지
너무 행복했어요.
내가 이 집에서 쓸모 있는 존재란 사실이
나를 자존감 팍팍 올라가는 밥솥으로
만들어주었어요.
취사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부터 나는 늘
뱃속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뜨거운 기쁨으로
가득 차서 즐거웠답니다.
내가 물속에 잠긴 쌀들을 꼭 감싸 안아
매끌매끌 윤기 나는 밥으로 변신시켜 놓으면
우리 주인이 맛있게 먹어주었는데
난 그걸 보는 게 언제나 좋았어요.
"주인님 어때요?
오늘도 내가 지은 밥이 최고로 좋은가요?"
라고 물어보면, 그래 언제나 네가 지은 밥이
최고야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답니다.
내가 우리 주인을 위해 밥을 지은 지
10년이 훨씬 넘었거든요.
그사이 우리 주인도 많이 늙었고,
나도 많이 늙었지만,
우린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참 좋은 밥동지였어요.
보통 가전제품은 10년이 평균 수명이라던데,
우린 그보다 오래 잘 지냈으니
평균 수명도 뛰어넘은 사이라니까요.
우리 주인은 밥에 대한 사랑이 한결같아서
늘 변함없이 취사 버튼을 눌러주었어요.
난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답니다.
취사 버튼이 눌리는 순간은
언제나 새롭게 설렜어요.
취사라는 글자만으로도 우리의 애정이
재점화되는 기분이었거든요.
우린 싫증을 잘 느끼지 않는 타입이라
오래 함께 해도 지겹지가 않았답니다.
그것부터가 잘 맞는 천생연분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위기가 없었던 건 당연히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딱 두 번의 위기가 있었지요.
몇 년 전에 내가 무지 아팠을 때였어요.
그 전날까지 멀쩡했던 내 몸이 다음 날이 되자
갑자기 오작동을 일으키지 뭐예요.
우리 주인이 나를 끌어안고서 서비스센터로
급히 달렸어요.
내가 처음으로 아픈 바람에
우리 주인이 되게 당황한 거 같았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은
주인이나 나나 마찬가지였죠.
다행히 나는 부속 하나만 갈아 넣으니까
치료가 되는 오작동이었어요.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그때 우리 서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두 번째 위기는 우리 주인의 컨디션이
무지 안 좋았던 시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밥을 좋아하던 주인인데,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면서 밥을 안 해 먹는 거 있죠.
한 번도 안 사 먹던 즉석밥 같은 걸 사다가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 내가 처음으로 우리 주인에게
외면당하는 기분이었어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주인이 그러니까
너무 외롭고 슬픈 시기를 보냈어요.
그런데요.
지나고서 알게 된 거지만 우리 주인이
몸이 힘들어서 그랬던 것뿐,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었더라고요.
올해는 다시 밥을 열심히 해 먹기 시작해서
나를 찾는 날이 많아졌어요.
우리 사랑 다시 회복되어 간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물벼락을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정말 삶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같아요.
나의 생이 순식간에 물 차서 끝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내 몸의 수난이 시작됐어요.
물벼락과 쌀 벼락을 맞았거든요.
비상! 비상!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비상사태라고요!
갑자기 쏟아진 물이 구석구석 스며들면서
내 몸을 마비시키고 있는 중이에요.
갑자기 우박처럼 두두두두 떨어진 쌀알들이
내 온몸을 공격하는 총알 같았어요.
오늘 쌀알들의 돌진은 평소에 내가
귀여워하던 알갱이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충격이었어요.
원래는 내가 쌀이랑 물이랑
무지 사이가 좋거든요.
쌀과 물이 밥솥 안의 내솥에 살포시 담기면
(*내솥 : 전기밥솥 안에 들어 있는 솥)
나는 마치 알을 품은 어미 새가 된 듯이
그들을 내 품 안에 꼭 감싸 안고 온기를 불어넣죠.
그러면 나의 온기로 익혀진 쌀들이 보들보들
매끄럽고 윤이 나는 밥으로의 변신이 이루어져요.
그것이 나의 일상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뭔가 크게 잘못됐어요.
내가 감싸 안아야 할 그 아이들이
오히려 나를 마비시켜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사고가 왜 생겼냐면
바로 우리 주인 때문이었어요.
아침밥을 하려고 쌀을 씻던 우리 주인이
잠이 덜 깼는지 밥솥에다 내솥을 넣지도 않고
씻은 쌀을 그냥 내게 막 부으려고 하는 거예요.
"악... 이게 뭐예요? 제발 멈춰요!!!
정신 차리고 확인 좀 하시라고요!
밥솥 살려~~~~~
이러다가 내부 장치 다 망가진다고요!"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우리 주인이
알아차리지 못하더니,
결국 씻은 쌀을 내솥도 없이 내 몸에다
다 붓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더라고요.
"헉... 이게 뭐야? 밥솥 어떡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너무 놀란 주인은
나를 품에 안고 뒤집어서 흔들었어요.
어떻게든 물이랑 쌀을 빼보려고 애썼지만
이미 늦어버린걸요.
내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있던 그때,
주인이 나를 들고 서비스센터로 갔어요.
몇 년 전에 내가 아팠을 때처럼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서비스센터였죠.
수리기사님이 나를 보시더니
내가 이미 단종된 모델이래요. 흑흑...
고치는 비용으로 새거 하나 사는 게 이득이래요.
억지로 고쳐봤자 오래 쓰지도 못한다고 했어요.
10년 쓰면 많이 쓴 건데 정말 오래도 썼다고 말했어요.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내 가슴 찢어지는 소리만 했어요.
나요.
그래도 좀 기대했단 말이에요.
전에도 고친 적이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헤어질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오늘 갑자기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밥 짓기 하려던 순간에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너무 하잖아요.
마지막으로 우리 주인이 내게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나에게 너무너무 미안하다고 했어요.
내솥 없이 솥에다 물을 들이붓는
정신 나간 짓만 안 했어도
한참은 더 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사고 쳐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주인은 되게 많이 아쉬워는 하는데,
오래 써서 본전을 뽑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만큼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너무 섭섭하더라고요.
주인이 한 번쯤은 더 나를 쓰다듬어 주고
제대로 슬픈 티를 팍팍 내주길 바랐지만
생각보다 주인은 덤덤했어요.
나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주인의 말이
뭐였는지 아세요?
우리 주인이 서비스센터 담장자에게
이곳에서 나를 버려줄 수 있냐고 묻는데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쉽게 여기서 나랑 이별한다고요?
우리 집도 아닌 이곳에서요?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나를 집에 데려가서 한 번은 더 보고
스티커 붙여서 내놓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나를 고치러 왔던 이곳에다
나를 버려달라고 말하는 건 너무해요.
정말 너무 해요.
나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주 신나고 즐거운 밥솥이었어요.
밥을 다 지어놓고 여느 때처럼
크크 웃으면서 주인을 부르려고 했었죠.
그랬던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면서도
우리 주인이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내 눈에 열심히 담아 보았답니다.
"언제나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해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