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너의 죄를 알겠느냐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심호흡을 해봅니다.

난 지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에요.

아휴, 정말이지 성질나서

머리가 더 지끈거리네요.

바로 커피 때문이에요.


오늘 커피는 큰 만행을 저질렀어요.

물론 커피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음을 알지만

커피가 저지른 일들로 인해

곳곳에 어수선한 흔적이 남아버렸기에

커피한테 짜증을 좀 많이 냈어요.



사건의 발생은,

커피가 머그컵인 나를 탈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인 컵을 탈출해서

분수처럼 사방으로 퍼지더니,

자그마치 12권의 책에 물을 들여놓았습니다.


커피는 나를 탈출하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았어요.

평소의 차분하고 분위기 있던 커피는

완전히 내숭이었던 걸까요.


왜 하필 책 쌓아놓은 쪽으로 흘러가서는

자기가 마치 물감이라도 된 것 마냥

아주 신이 나서 책들의 하얀 종이를

마구마구 색칠을 해버리냐고요.

커피 물을 잔뜩 들여놓은 걸로도 모자라

젖은 책들을 쭈글쭈글하게 만들어버렸죠.


그 자리에 있었던 20권의 책 중에

중상자는 12권, 그 와중에 8권은

"악~~" 소리 내면서 급히 옆으로 치운

주인의 손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조가 되었어요.


사실 구조만 된 것이지 커피의 흔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8권의 책을 한꺼번에 옮기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책에 살짝이라도 커피 얼룩이 남는 것을

도저히 피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12권의 심각한 중상자에 비해서는

얼마나 다행이냐고 주인이 가슴을 쓸어내렸죠.



내가 그동안 커피를 자주 만났음에도

오늘에야 알았지 뭐예요.

커피 얘가 이렇게 민첩하단 것을 말입니다.

한번 탈출하니 아주 자기 세상 만난 듯이

정말 재빠르게 번져나가더라고요.

그렇게 짧은 순간에 여기저기 얼마나

자신의 존재감을 남기고자 했는지,

머그컵인 내 주변에 있던 것들에

한 방울이라도 안 튄 데가 없습니다.


커피 이 녀석이 아주 신이 나서

근처를 다 헤집고 다닌 바람에

책들은 쭈글쭈글 갈색 종이가 되는

심한 부상을 당했어요.


근처에 놓여 있던 프린트기도 하마터면

커피 벼락 맞아서 기계 망가질 뻔했죠.

며칠 전에 주인이 구입했던

아직 읽지도 못한 그림책들도

사자마자 헌 책이 될 뻔했습니다.


커피가 제일 가까이 있던 책들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달려가서 껴안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프린트기가 더 가까이 있었고 집중적으로

중심부에 쏟아졌더라면,

기계니까 치명타를 입을 뻔했는데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왕에 벌어진 일들이니,

애써 다행인 점들을 찾아보는 중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새로 산 예쁜 그림책마저

얼룩지게 만들었다면,

커피 요 녀석을 주인이 용서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나마 주인이 참을 수 있는 건 그림책들이

무사해서인 것 같아요.


주인뿐만 아니라 사실은 나도

화사한 그림책 애들이 새로 와서

너무 기분이 좋았거든요.

무사한 그림책 애들 생각하며 좀 진정되다가도

부상당해서 심하게 쭈글거리는 다른 책들 보면

내가 혈압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경질 나는 와중에도

신기했던 게 있습니다.

분명 머그컵인 나의 크기는 정해져 있는데

내 안에서 탈출해서 나온 순간에

커피의 양이 몇 배로 더 많아진 걸까요?

아니면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걸까요?


전래동화에 나오던 바닷속에 가라앉은 맷돌이

자꾸만 소금을 더 나오게 하듯,

무슨 양이 그리도 많아 주변 곳곳에

커피 얼룩의 흔적을 그리도 많이

남겨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방 곳곳에 야무지게도 뿌려놓은

커피의 흔적을 보면서 실소가 나왔습니다.

미운 건 미운 거고 그 와중에 존재감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한 가지만 할 것이지

이랬다저랬다 나도 아주 감정이 널을 뛰네요.

아무래도 커피가 탈출할 때 나를 쓰러뜨렸던

후유증이 큰 것 같아요.

그 순간 옆으로 힘없이 픽 쓰러져 있던 내가

너무 수치스러웠거든요.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커피가 무슨 죄인가 싶기도 합니다.

1차적인 잘못은 주인이 했거든요.

주인의 손가락이 머그컵인 나를 잘못 건드린걸요.

주인의 손가락 때문에 휘청이다

쓰러진 내가 아니었다면

커피가 탈출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커피는 탈출하고 신나서 여기저기에

얼룩 그림 그리고 다닌 죄밖에 없어요.

주인은 자신의 손가락 때문에 커피를 쏟고

쭈글쭈글해져 버린 책들을 보는 것이 속상해서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겁니다.

애꿎은 커피한테 원망을 퍼부어댔어요.



투덜거리는 주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는 언젠가 커피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다른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자유롭게 밖으로 돌아다니고 싶었을 텐데

늘 컵인 내 안에만 담겨 있어야 하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싶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살짝 스친 주인의 손가락을 기회로 삼아

그렇게 몸을 출렁거리다가,

탈출을 시도할 줄은 몰랐기에 너무 당황했어요.


친구가 필요했던 커피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래도 성급한 탈출은 문제가 많았다고,

커피가 듣든지 말든지 긴 잔소리를 늘어놓았어요.


"커피야, 나 사실은 알아.

네가 다른 친구들을 봐서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껴안은 거라는 거!


근데 네가 아무리 다른 애들이 좋아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껴안아도 소용없어.

다른 애들은 너 안 좋아해.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고!


미리미리 인사도 좀 건네고,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서서히

다가갔어야지.

네 맘대로 달려가서 확 안으니까

애들이 얼마나 놀랐겠니?


일방적인 네 모습에 화나서

두 번 다시 너랑 안 보겠다잖니.

거기다 지워지지도 않는 얼룩에

쭈끌쭈글 못생겨지게 네가 바꾸어버린 책들이

어떻게 쉽게 너를 용서하겠니?


네 몸은 다른 애들을 젖게 만들고,

원하지도 않는 색으로 물들인단 말이야.

네가 일부러 그러진 않았다고 해도

종이들에겐 얼룩과 쭈글쭈글 상처를 남긴 거라고!"


그렇게 사방으로 쏟아내고도

나의 바닥에 조금 남았던 커피가

그 말을 듣고 시무룩해졌어요.

자기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냥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질 못하네요.

그러다가 커피가 이렇게 물었어요.


"머그컵 언니! 그러면 나는...

컵 바깥의 누구랑도 친구가 될 수 없어?"


그 말을 하는 커피가 안되어 보였어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들에 놀라서

커피색이 더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거든요.

기죽은 커피한테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어

커피에게 좀 미안해졌어요.


주인은 단단히 화가 났고,

나도 덩달아 짜증이 난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커피에게만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커피야,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너랑 만나도 젖지 않는 애들이랑은

친구가 될 수 있어.

아니 너를 만나 젖는 애들이라도

닦아내면 금방 괜찮아지는 애들도 있어.

종이책들도 젖지 않게 조심만 하면 괜찮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어."


"정말이야? 조금 위로가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이 가기 전에

커피에게 이 말도 해주고 싶었어요.


커피, 너의 죄를 알겠느냐고 다그쳤지만

사실은 부주의한 주인의 손가락으로부터

커피를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해서

대형사고를 치게 만든 미안함이 있었거든요.

그 짜증을 커피에게 대신 퍼부었음을

반성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미안해서 입이 잘 안 떨어졌어요.


"저기 있잖아. 커피야!"


"응?"


"내가 안 쓰러졌어야 했는데...

너무 힘없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욕을 너 혼자 먹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커피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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