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풋사과.
고등학교 3학년, 엄마와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으로 출발하면서 먹었던 사과 이후로 기억에 남는 아침 사과이지 싶다. 아침에 사과를 챙겨주는 종족들은 최소한 아침형 인간이다. 이들은 통제력이 높고, 돈을 착실하게 잘 모은다. 미래에 관한 대비책이 최소 3가지 이상은 있다.
아침에 사과 하나 챙겨준 사람에게는 과분한 해석일 수 있겠지만, 과연 하루아침에 생기는 습관일까. 하루 만에 되었다면, 어제의 나는 면접에 통과하는 게 맞았다. 면접 전 10분, 갑작스레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펼친 휴대폰,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 기사를 외웠다.
“최근 롯데그룹 유동성 위기설 관련하여 이야기 많은데, 이와 관련 성범 씨의 생각을 말씀해 보시지요.” 대표님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최근 채무상환 관련 이자비용 5배 이하 조항에 관해 미달된 부분은 유감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커버넌트 위반 상황에 있어 10년 전 주주와 체결한 특약 조항이 독소조항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는데, 이에 따라 롯데그룹 측은 충분한 현금 흐름 확보를 통해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근원적 경쟁력을 어디서 찾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면접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천년감수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가 내가 이 회사를 붙게 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쾌재를 내심 속으로 부르고 있었다. 동시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부장님이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인사치레만 간단하게 할 거예요...’
부장님은 1차 면접부터 만난 면접관이다. 2차에서도 자리 맨 끝에 앉아 계셨다. 그에게 있어 ‘간단하게’ ‘인사치레’는 결코 내가 생각하는 수준의 의미가 아니었다. 흔히 ‘욕만 안 하면 붙는다’는 대표이사 면접에 본부장 2명도 들어와서 대기업과 같이 장 책상을 앞두고 서류더미를 올려놓은 뒤 자기소개부터 하라고 시작한 것이다. 한 분은 노골적으로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의자에 차분히 엉덩이를 앉히고 주먹을 쥔 채 30분간 대답해 온 것이다.
“성범님의 자질은 훌륭한데, 경력 기준이 미달되다 보니, 저희가 경력으로, 아니면 신입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곤란한 부분이 있네요. 여하튼 긍정적인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은 말씀을 끝으로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문을 나서고, 조용히 닫았다. 집에 도착해서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다음 날, 아침에 사직서를 내고, 오후엔 부장님의 연락을 받았다.
“성범님, 이번 면접결과, 아쉽지만 함께 못하게 되었습니다. 데스크는 강력하게 주장을 했지만 경영진에선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며 거절했습니다.”
나는 입가의 미소를 유지한채 평이하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끊었다. 3번까지 즐겁게 선을 본 여자에게 차인 기분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술이 수면위에 드러났던 물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기분이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땅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론에 도착해 있었다. 10년지기 친구 윤주는 말했다.
“팩폭 하기 싫은 거야. 답은 형이 알 거잖아.”
그렇다. 그저 경력직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하루아침에 쌓은 경력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그들이 하루아침에 만드는 것에 비해 성이 차지 않을 수 있다.
사과는 항상 깎여있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날만 깎아서 내놓은다 한들 들통나기 마련인 것이다. 아침에 사과를 내놓으려면 보이지 않는 연단이 필요하다. 전날에 일을 마치고 시장을 보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사과를 직접 손으로 깎고, 미리 씻어진 정갈한 접시에 담을 미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챙길 뿐만 아니라 타인도 챙길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사과를 다 씹어 먹었다. 편집장님은 그 사이에 두유를 놓고 가셨다.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