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생들은 영어공부를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 수학을 포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영어는 끝까지 놓지 않는다. 다들 알다시피, 영어가 학교 밖에서 써먹을 일이 가장 많다. 요즘 영어를 모르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영어로 된 가게 간판이 어찌나 많은지, 가게 이름을 읽기도 힘들다. 모바일 어플들도 영어를 모르면 사용이 제한적이다. 한글만 알아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영어를 모르는 게 신문맹이 아닌가 싶다. 내가 추측만 해도 이럴진대, 우리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겪는 불편은 오죽할까.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영어가 참 어렵다. 돌아서면 배운 걸 까먹는다. 과학, 국어, 사회 같은 과목과 비교하면 학습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것이니 힘든 게 당연하다. 영어 선생님들의 목표는 소박하다. 검정고시에서 영어 40점을 받는 것. 합격선인 60점은 너무 과분한 성적이고, 40점이라도 받아줬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학생들이 잘하는 나머지 과목으로 평균 60점을 만들어도 검정고시를 합격할 수 있다. 학생들은 도덕 80점이 영어 40점보다 쉽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소박하고도 찬란한 40점을 받기 위해 학생들은 그 어떤 과목보다 영어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
내 수업 때는 대답도 잘 안 하시면서, 영어수업 때는 어찌나 큰 목소리로 말하기 연습을 하시는지. 교실 밖으로 챈트가 울려 퍼진다. 영어단어로 노래도 아닌 랩도 아닌 괴랄한 무언가를 주문 외우듯이 단체로 합창한다. "He is under a desk", "You are under a desk" 같은 간단한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서 랩을 한다. 학생들도 민망한지 웃음이 남발한다. 내 수업은 나 혼자 열심히 떠드는 수업인데, 대체로 영어수업은 학생들의 입이 바쁘다. 입술이 얼얼할 지경이다.
영어선생님들은 대체로 냉정하다. 학생들의 호소에 단호하다.
"선생님, 저는 영어단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안 외워져요."
"에이 어머님, 진짜 공부를 끝까지 해보셨나요? 사실 몇 번 본 거뿐이잖아요? 외워질 때까지 물리도록 반복해 보세요. 제가 단어 녹음파일 드릴 테니까, 집안일하면서 틀어두세요. 그리고 입으로 따라 하세요. 외워질 때까지!"
"선생님, 이 영어단어 발음을 한글로 적어주세요."
"이번 한 번만 적어줄 거예요. 자꾸 한글에 의존하면 영어단어를 읽는 실력이 안 늘어요. 영어단어의 발음을 꼭 외우세요. 하다 보면 늘어요."
"be동사가 대체 뭐예요. I는 am이고, you는 are고. 이게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셔도 일단 외우세요. 외우고 나면 나중에 알게 돼요"
(1년 후)
"선생님!! 나 이제 be동사 뭔지 이제 알았잖아 정말!!!!!"
be동사가 이해가 안돼도 무조건 외우라는 둥.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 거 맞냐는 둥. 지독한 사람들이다. 친절하지 못한 교습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단호함이 학생들이 좌고우면 하지 않게 도와준다. 1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해서, be동사를 깨우친 분도 못지않다.
초등반 영어선생님들이 만든 문제들이다. 불과 4개월밖에 영어를 배우지 않아서, 알파벳을 겨우 쓸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알파벳은 기본이고 제법 실용적인 영어 단어들이 문제로 등장했다. 학생들 중 서너 명은 처음에 비해 상당히 많이 늘었다고 귀띔해 주셨다. 이번 자체 평가에서 100점을 맡으신 분도 계셨고, 모두가 50점 이상을 받았다. 공부를 해도 늘지 않는다고 절망하시지만, 사실은 조금씩 지식이 쌓이고 있다. 본인들은 알고 있을까.
공부 3~4년 차분들이 계신 고등반이다. 문단을 읽고 해석하는 문제들이 등장한다. 실제 고등학생의 영어 수준에 비하면 무척 쉬운 문제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영어 실력만 돼도 어디 가서 영어 때문에 어려움은 겪지 않을 거다.
얼마 전, JTBC '아는 형님'에 배우 고두심이 출연했다. 그녀가 미국에서 사는 손자와 의사소통이 힘들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왔다. 손자가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고 한다. 본인은 영어를 잘 못하고. 부모님 세대들 중에 영어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 우리 학생들을 보면, 어머니 세대들이 말은 안 해도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큼을 알게 된다. 이해하지도 못한 영문법을 어쩔 도리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학생들을 보면 답답함과 경건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비단 우리 학생들만의 꿈일까. 말은 안 해도 우리 어머님 세대들은 다 가지고 있는 소원일 거다. 해외여행 갈 때 입국심사에서 조마조마하지 않으려고. 어린 손주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영어로 된 문서의 대강의 뜻이라도 알고 싶어서. 저마다의 이유로 영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때문에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학생들을 보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제일 빠른 법이라고. 느린 길이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