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수업을 하다 보면 황당할 때가 있다. 학생들이 내가 가르쳐 준 것과 전혀 다른 기억을 할 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러분, 저번 시간에 임진왜란에 대해서 배웠었죠? 배웠던 내용 중에 기억나는 거 있으시면 말씀해 보실까요?"
"어유 그럼요. 진짜 중요한 거 많이 배웠어요. 그 광개토대왕이 의병을 일으켰잖아요. 그분이 전쟁을 잘해가지고 유명한 왕이었죠? 하여튼 우리 국민들이 예부터 나라의 어려움에 팔을 걷었어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한국사람이면 이런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해요."
"?"
"지난주에 배운 개화기 우리나라 상황들, 기억나시나요? 너무 여러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서 이해가 잘 안 가셨을 거 같아요."
"아유 선생님이 어찌나 꼼꼼하게 알려주셨는지.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어요. 그 흥선대원군이 서양에 우리나라를 개방을 안 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벌어진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청나라도 우리를 침략해서 우리나라 왕이 청나라 방향으로 절을 하잖아요. 아주 치욕적으로. 지금도 석촌호수에 가면 삼전도비 있다고 하셨죠? 그 뒤로는 며느리인 민비가 나라를 쥐락펴락한다고 하잖아요?"
"?????"
어디서부터 다시 알려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결단코 나는 그렇게 가르쳐 드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난 소설 쓰기 수업이 아니라 역사수업을 했는데. 아마 그냥 학생 본인이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과 나의 수업 내용이 기가 막히게 섞였을 거다. 어딘가 역사에 있는 내용이긴 한데, 이게 주인을 잘못 만났단 말이지. 미묘하게 맞는 내용과 틀린 내용이 서로 뒤틀려서 그럴싸해 보인다. 그래서 더 환장한다. 어쨌든 수업 내용을 이상하게나마 알고 계시니 칭찬을 해드려야 하나. 아니, 칭찬을 하면 개선을 안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잘못을 지적하기에는 수업을 열심히 들은 흔적이 확실하잖아? 찰나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 야학 학생분들은 이미 머릿속이 인생의 경험으로 꽉 차있나 보다. 그래서 머릿속에 자리를 만들어서 지식을 넣는 게, 인생의 지혜가 없는 어린아이들의 머리보다 힘들겠지.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아예 백지의 상태보다 더 교정하기 힘들다.
실제로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를 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만 남을 때가 왕왕 생긴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서 굉장히 뿌듯한데, 막상 문제를 풀면 다 틀리는 경우다. 나도 예전에 영어단어를 외울 때 '이 단어를 분명 공부한 기억은 있는데, 뜻이 뭐였는지는 생각이 안 나'서 괴로웠던 적이 많다. 일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 하루종일 일이 너무 많았네. 머리가 터질 것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을 때. 이럴 때면 난 도대체 뭘 한 것인지 맥이 빠진다. 그래서 학생들의 '학습 공갈빵'의 상황이 속 터지면서도,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아서 짠하기도 하다.
그나마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있으면 다행이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갈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야학 학생분들은 본인이 '공부한 내용을 알고 있지 않다'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자, 3+2는 숫자의 순서를 바꿔도 돼요. 하지만 3-2는 순서를 바꾸면 답이 달라지죠. 교환법칙 때문에. 이거 수학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죠?"
"선생님. 이건 안 배웠어요. 수학선생님하고는 양수, 음수 이런 거 하고 있는데. 교환법칙은 안 배웠어요."
"아~ 안 배우셨구나. (수학선생님 눈물)"
분명 수학선생님이 나에게는 교환법칙을 알려줬다고 하셨는데? 진도상 이걸 수업을 안 했을 리도 없고. 내가 굳이 '이거 배웠는데요? 내기하실래요?'라고 싸우진 않겠지만,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걱정은 된다.
학생들의 수업참여도는 전국 일등이라고 자부한다. 우리 야학에는 현직 교사로 재직 중이신 선생님들도 제법 계신다. 이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10대 학생들보다, 야학 학생들이 공부에 더욱 진심이다'는 거다.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엎드려 자는 사람은 볼 수가 없다. 오죽하면 현직 교사분이 '선생님이 저녁에 봉사활동 하는 곳에 하루만 와봐라. 어른들이 어떤 자세로 공부하는지 너네도 한번 봐야한다.' 라고 고등학교에서 말하셨을까.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데, 잘못된 지식을 얻어가는 거 같아서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들의 노력이 헛수고일까 봐.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말까? 에이 그건 아니지. 그래도 공부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느낌적인 느낌'이라도 건져가는 게 좋지 않을까?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공부의 즐거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공부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은 건강에 좋다. 하루만 공부할 건 아니니깐, 오래 공부하려면 포만감이 필요하니깐. 가뜩이나 '공부는 어렸을 때 해야 잘됐는데. 지금은 머리가 굳어서 힘들어요'라고 슬퍼하는 학생들이다. 겨우 이런 걸로 기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자주... 그러진 마... 시길...)
'제로슈가' 음료 같은, '제로지식' 공부. 당연히 살은 안 쪄요 ㅠㅜ
※ 썸네일 출처 : 유튜브 채널 '공부왕 찐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