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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Sep 20. 2022

코로나 팬대믹, 우리의 생존기

 코로나로 전 세계가 난리가 났을 때, 우리 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야학의 학생들은 모두 코로나에 취약한 고연령자고, 선생님들은 대부분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행여나 야학에서 학생들이 코로나에 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업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웠다. 때문에 2020년에는 거의 1년 동안 수업을 못했다.


 2021년, 내가 초등반 국어를 가르칠 때였다. 마스크와 손소독제에 의지하며 잘 버티면서 꾸역꾸역 대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델타 바이러스가 나라에 급속하게 퍼졌다. 강화되는 방역지침과 학생들의 불안감에는 특효약이 없었다.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수업을 멈추면 검정고시는 물 건너간다. 선생님들은 고민이 깊어졌다.


"줌으로 수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중등반, 고등반은 지금 줌으로 수업을 하고 있던데"

"우리 반은 초등반이라... 비대면 수업을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님들이 공부에 익숙하지 않으시고, 핸드폰도 잘 사용하지 못하실 것 같아요."


 자신은 없었지만 선생님들은 비대면 수업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대면 수업은 상황상 힘들었고, 다른 대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대면 수업을 해보고 정착하면 다행이고, 정착 못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2일 동안 수업시간 내내 학생들 핸드폰에 네이버 웨일을 설치하고 접속방법을 가르쳐드렸다.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화상회의 접속방법을 문서로 작성해서 전달해 드렸다. 마지막 대면 수업 날, 이제는 교실이 아닌 집에서 화상으로 수업을 하자고 모두 인사를 했다.


"선생님, 언제까지 비대면 수업을 하나요?"

"글쎄요. 두 달쯤 하지 않을까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교실로 다시 와야죠"

"그렇군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한 어머님은 다시는 못 볼 사람에게 인사를 하듯, 나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작별인사를 하셨다. 아마도 그분은 내심 비대면 수업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신 것 같다.


화상회의 사용법 문서 캡처본


화상수업 모습


 화상수업은 과연 성공했을까? 내 우려가 무색할 만큼 너무도 빨리 비대면 수업이 자리 잡았다. 대면 수업과 다를 것 없이, 학생들은 제시간에 수업에 들어오셨다. 가끔 누군가가 늦으면 서로 전화를 돌려서 왜 안 들어오냐고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어머님들, 못한다고 하시더니 화상수업 엄청 잘하시네요!"

"우리 손자가 도와줬지 뭐. 할머니가 공부한다니까 아이패드를 주고 갔어요."

"바깥양반이 도와줬어요."(야학에 같이 다니시는 부부다)


 교실에서 눈을 맞춰가면서 하는 수업보다는 학생들의 피드백을 얻기는 어렵지만, 건강 걱정 없이 수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선생님들도 화상수업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수학 선생님은 판서를 위해 펜슬 기능이 있는 노트북을 구입했다. 일흔을 넘긴 한글 선생님은 팔자에 없는 화상수업을 배우는 데 여념이 없으셨다.


 비대면 수업은 이따금 소소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혜원 씨의 핸드폰은 다른 사람보다 10초 딜레이가 있었다. 남들보다 10초 늦게 대답이 들리기 일쑤였다. 다른 학생들은 '저 언니 또 그러네 또 그래' 하면서 웃음을 터트리셨다. 직접 만나지 못하니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현장감이 없다 보니, 학생들이 조는 모습도 여과 없이 송출되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나는 가끔 비대면 수업을 활용한 컨닝을 감행했다. 당시 역사 수업이었는데 '왕건은 몇 년도에 태어났나요?' 같은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뜸을 들이면서 냉큼 구글의 힘을 빌렸다. 학생들은 '저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어.'라며 혀를 내두르셨다.


 비대면 수업을 시작하고 한 달쯤 후, 미순 씨에게 수업을 나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워낙 출석률이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하시던 분이라 의외였다. 그 후로 이따금 이분은 수업에 들어왔으나, 마이크와 카메라를 끄시고 조용히 수업만 듣고 나가셨다. 들어오는 시간도 불규칙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 당시 부군께서 많이 편찮으셨다고 한다. 간병을 하느라 수업에 오지 못하셨다. 짬이 날 때 병실에서 라디오처럼 야학 수업을 틀어두셨다고 한다. 비대면 수업이었기 때문에 이분이 그렇게라도 수업을 들으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병원 생활에 우리 수업이 도움이 되었으려나. 비대면 수업의 장점을 느낀 순간이었다.




 코로나가 좀 잠잠 해졌을 때 어머님들과 대면 수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머님들~ 이제는 백신도 맞았고, 코로나도 잠잠하네요. 이제 교실에서 만날까요?"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이 너무 편한데... 이제 겨울도 오는데 학교 오가는 게 힘들어요"

 "비대면이 더 좋은데요 선생님~"


 난 겉으로는 아쉬운 척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재택근무를 할 때 내 마음을 어머님들이 똑같이 느끼고 계셨다. 그렇게 두 달로 예상했던 비대면 수업은 세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다행히 이때 모든 어머님들이 검정고시를 무사히 합격하시고 중등반으로 올라가셨다. 우리의 우당탕탕 비대면 사건사고들은 가끔 신입 학생들에게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한다.


 어려움을 같이한 전우들이라 그런가. 그때 함께 했던 학생들은 지금도 각 학급에서 모범이 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야학은 내키지 않는 반강제적인 변화를 맞았지만, 거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느꼈다. 나이가 많아도 의지가 있다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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