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매년 5월이면 시화전이 열린다. 학생들은 특정 주제를 가지고 시와 그림을 그린다. 우리 야학만 시화전을 하는 건 아니다. 국가문해교육센터에서 전국적으로 주관하는 행사다. 우리 야학을 포함해서 성인문해 지원금을 받는 기관들은 대부분 참여한다. 행사 참여가 필수는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가급적이면 협조적으로 작품을 센터에 꼬박꼬박 제출한다. 지원금을 주는 곳 입장에서도 아웃풋이 있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사실 시화전은 기피하고 싶은 활동이다. 우리 기관의 목적과 맞지 않아서다. 우리 야학에 오시는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온다. 시 쓰기나 그림 그리기 수업을 하려고 온 게 아니다. 시화를 그리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가장 편하고도 무책임한 논리인 '위에서 시키니깐' 하는 거다. 게다가 4월에 학기를 시작하는데,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돼서 시화를 그려보자고 하니 막막할 거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라니. 입장 바꿔서 나도 시 쓰기는 부담스럽다.
시화전에 대한 반응은 학기마다 다른데, 작년에는 몇몇 학생들의 거부감이 컸다. 화를 내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느라 국어 선생님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올해는 학생들이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려고 고민을 해봤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시를 써보는 것도 문학 공부다. 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완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명분을 세웠다. 솔직히 궁색하고 나 스스로도 납득이 안된다. 학생들이 공감할지 모르겠다. 역시 이런 행사는 나와 결이 다르다.
"선생님, 제가 쓴 시를 우리 애한테 보여줬는데 이상하대요. 선생님이 보기엔 어때요?"
"저는 두 개를 만들었는데요. 둘 중에 뭐가 더 잘한 것 같아요? 그걸로 출품하려고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썼는데 혹시 너무 긴가요?"
올해는 좀 이상하다. 시화 그리기를 시작한 지 2주가 훌쩍 지나도록 아직도 못 끝내고 있다. 아니, 학생들이 끝내질 않고 있다. 보통 2~3시간이면 완성하는데 말이다. 평소에는 수업 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거나, 학생들끼리 수다를 떠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시화전 동안에는 크레파스를 들고, 매직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덕분에 학교가 난장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정성을 들인다.
시화전을 무사히 끝낸 지 두 달이 지났다. 요즘은 작품을 모아서 시화집을 만들고 있다. 이 시화집은 후원자분들께 굿즈와 함께 배송될 것이다. 편집 작업을 위해서 두 달 전에 만들었던 시들을 다시 들춰본다. 작품마다 저마다의 인생이 담겨있다. 왜 야학에 왔는지, 어렸을 때 왜 공부를 하지 못했는지, 공부를 하는 기분이 어떤지, 졸업하고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나는 학생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감정이 앞서는 걸 경계해서다. 행여나 학생들의 인생을 신파극으로 느낄까 봐, 그래서 동정심을 가질까 봐. 하지만 시들을 읽다 보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학생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 수확은 내가 의도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올해 시화전은 훈훈했다.
가끔 잊는다. 야학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걸. 똑같은 선생님이 있더라도, 파트너인 학생에 따라서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 야학은 학생을 위해서 있고, 학교를 만들어가는 진짜 주체도 학생이다. 교사는 그저 도와줄 뿐이다. 이 사실을 잊고, 교사들이 모든 짐을 짊어진 듯 끙끙댈 때가 있다. 조그만 불화에도 내 잘못 같을 때. '내가 한 이 말 때문에 학생분이 공부를 포기하셨나.' 같은 자책들. 그럴 필요가 없다.
시화전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왜 시를 써야 하는지 이유도 제시하지 못했는데, 학생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잖아. 역량이 부족한 선생님이라도, 스스로 가치를 찾아가는 학생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들을 믿고 부담을 덜어내고 있다.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수상작을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에 가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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