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홀 뒷 이야기 2.
캐나다와 호주에서 외국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가 한국을 떠나 있던 시간 동안 새로 생긴 신조어가 있었는데 바로 '헬조선'이라는 단어였다.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왜 한국인 스스로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외국 생활은 매일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적응하느라 시간이 정말 번개처럼 지나간다. 지난 3년, 한국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정말 말 그대로 지옥일까?
저 멀리 인천대교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베트남 하노이를 떠난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오랜만에 보지만 익숙한 지형과 색깔들. 뭐든 너무 가까이서 보면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미술관에 갔을 때, 큰 그림일수록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봐야 그림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외국 생활하는 동안 나는 한국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밖에서 바라본 한국은 안에 있을 때 보다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쟁 후 100년도 안된 역사를 가진 나라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으로 전 세계를 수놓고, 올림픽마다 최종 순위 10위 안에 들며, K-pop과 드라마를 필두로 문화적으로도 주류시장에 여럿 진출했다. 한국에서 구매한 옷이나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날이면 외국 친구들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어디에서 샀냐고 물어보고는 한다. 'From Korea'라고 대답할 때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요즘 말로 이런 걸 '국뽕'이라고 하나? '국뽕'이란 말이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은 알지만 뉴욕 한복판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삼성이나 현대 광고가 나오면 거기에 내 지분이 1도 없으면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록적인 성장으로 얻은 좋은 성적 뒤에 무언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이다. 평균 업무 시간이 긴 한국 근로자들은 그만큼 개인 시간이 적고 가족들과 보낼 시간 역시 적다. 우리의 아이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심적으로는 더 빈곤해졌다. 그 안에서 우리 권리 또한 스스로 많이 포기하고 사는 듯하다. 이제는 모든 것들의 균형을 맞추는데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처음 한국에 돌아온 2주 동안은 매우 좋았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으며, 서비스는 왜 또 이렇게 빠른지. 특히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2주가 넘어가면 조금씩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서로 밀치는 사람들, 차선 변경하려 깜빡이를 켜면 오히려 비켜주지 않으려 액셀레이터를 옆 차선의 자동차들. 어디서 무얼 하던 항상 광고에 노출되어 욕망은 커지지만 그것들을 모두 채울 수는 없어 불만족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트렌드에 매우 민감한 나라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트렌드를 너무 앞서 가는 것도, 뒤처지는 것도 싫어한다. 다 같이 손을 깍지 끼고 그 트렌드에서 너무 벗어나지 못하도록 서로 감시를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거리에선 비슷한 패션, 헤어스타일, 비슷한 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다. 핫 하다는 곳은 다 가봐야 하고 유행하는 것은 다 먹어보고 입어봐야 한다. 매년 새로운 연식의 자동차가 나오고 핸드폰이 나오고 기술적인 면에서는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발전하였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눈이나 팔, 다리가 대여섯 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고 오감을 통해 세상을 느낄 뿐이다. 인류의 적응 속도보다 빠른 기술의 발전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 많이 있다. 목표를 빨리 이루는데 너무 집중하다 보면 과정을 오롯이 즐길 수 없는데, 이런 경우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경쟁이던 우승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1등 외에 모든 사람들이 패배감이나 절망을 느껴야 한다면 그 사회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매달, 매년의 변화를 막대그래프나 꺾은선 그래프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인생은 이런 평면 그래프처럼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나선형 계단처럼 진화한다. 나선형 계단을 하늘에서 보면 그냥 원과 같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 든다. 위에서 평면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빙빙 돌고 있는 게 맞지만 옆에 보면 우리는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외국 생활을 경험한 후 나 스스로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이 드는 건, 환상이 사라져 무언가를 막연하게 동경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이 많이 사려졌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바꿔야 했다. 광고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조금 더 집중하면 한국에서도 외국 같은 마인드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국민들의 최고 권리는 투표이고 소비자의 최고 권리는 소비이다. 각자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고 투자하다 보면 사회는 조금 더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단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