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일 차, 매니토바주 위니펙을 지나 리자이나까지 달리다.
정말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안 그래도 따뜻한 분위기의 캠핑장에 햇살이 더욱 따뜻하게 내렸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몬트리올에서 출발한 뒤 맞이하는 여행 4일 차 아침이다. 우리는 캐나다 중부지방인 매니토바주에 있고 오늘 위니펙으로 들어간다. 캠핑장의 다른 여행자들은 새로운 하루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우리도 덕분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어 받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줄리는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어제 찍은 사진들을 감상했다.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자 지난 3일을 정말 열심히 달렸다. 그만큼 시간을 알뜰하게 썼더니 이제야 이런 여유가 좀 생긴다. 역시 여행을 할 때 돈만큼 중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아끼려면 돈이 들고 돈을 아끼려면 시간이 든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각각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적절한 타협을 보는 게 좋은 여행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오늘은 위니펙이라는 도시는 매니토바주의 주도다. 중부지방으로 들어온 뒤에 만나는 첫 도시라서 사뭇 기대가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인 것이다. 지난 3일의 대부분을 길 위나 캠핑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는 도시가 반갑다. 현대인에게 도시는 스트레스와 에너지를 동시에 주는 애증의 공간이다.
텐트를 신속하게 정리하고 위니펙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캠핑장은 위니펙 중심에서 불과 1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온통 사방이 녹색 천지의 자연이었다가 조금씩 건물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에게 처리할 업무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체국에 가서 Bell에 소포 보내기. Bell은 캐나다의 인터넷과 핸드폰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회사로 우리나라로 치면 SK텔레콤 같은 회사다. 캐나다에 사는 동안 Bell의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이번 여행 후 캐나다를 떠나게 되면서 인터넷 서비스를 종료했다. 사용했던 모뎀을 택배를 통해 Bell 본사로 보내야 했다. 우체국만 열면 10분이면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인데 그걸 못해서 2,415.7km를 이 박스와 함께 달려왔다. 여행 출발일이 금요일이었지만 새벽에 출발하느라 집 앞에 우체국을 이용하지 못했고, 오타와나 토론토 같은 큰 도시들을 그냥 지나치다 보니 우체국을 만날 수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 동안 박스를 계속 차에 싣고 다니다가 드디어 월요일인 오늘 붙일 수 있는 날이 다시 돌아온 거다. 소포 박스에 적힌 이 모뎀의 최종 종착지는 캐나다 토론토였는데, 우리는 토론토를 이미 2천 킬로미터나 지나쳐있다. 뭔가 숙제를 마치지 못한 거 같아서 오늘은 꼭 해결해야지 다짐을 했다.
그런데..
텅 빈 위니펙의 거리.. 다들 어디 간 거지?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 폴'에 나오는 시간이 멈춰버린 그 순간처럼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를 아무리 둘러봐도 위니펙 시티에는 마치 줄리와 나 단둘만 있는 것처럼 너무 조용했다. 오늘이 월요일이 맞는걸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확인했다. 어렵게 만난 주차요원에게 물어봤더니 오늘이 마니토바 주정부의 공휴일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랜만에 찾은 도시의 시내가 공휴일로 텅 비어있다. 신호등이 무의미하게 깜박거린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거리가 조금 그리웠는데 아쉽다. 당연히 소포도 붙일 수가 없었다. 덕분에 한적한 도시를 하염없이 걸어본다. 텅 빈 거리에서 사진도 마음껏 찍어본다.
지난 글에서 캐나다의 도시와 마을 구분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도시들 중에서 또 규모별로 순위를 매겨보자면 토론토와 몬트리올, 밴쿠버 정도를 대도시라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중소도시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워낙 큰 도시가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작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체감하기에 캐나다 제2의 도시라는 몬트리올이 시내의 크기와 인구밀도를 따져보면 우리나라 천안보다도 작을 것이다. 북미를 통틀어도 서울보다 큰 도시는 열 손가락 안에 충분히 꼽을 정도니 우리 대한민국의 인구 밀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그러니 북미를 여행할 때 도시에 대한 환상을 갖는 건 금물이다. 도시의 화려함보다는 사는 방식의 다름을 이해하고 여유롭게 걷고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24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그런 슬로시티라고 생각하면 된다.
캐나다의 공휴일은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이 닫는다. 쉬는 날엔 정말 공평하게 모두가 함께 쉰다. 노동자들을 존중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문화 덕분이다. 최근에는 이민자들, 특히 아시아 이민자들이 하는 상점이나 식당은 여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의 공휴일에 영업하는 상점이나 식당을 찾는다면 차이나 타운을 가보면 좋다. 우리는 시티를 가볍게 돌아보고 위니펙에 있는 한인마트를 찾았다. 라면이랑 한국 과자, 생필품들을 한가득 리필했다. 몬트리올에서 위니펙까지 왔는데 하필 휴일이라며 사장님께 잔뜩 너스레를 떨며 마트를 나섰다. 같은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몬트리올에 사는 한인과 위니펙에 사는 한인은 서로를 신기해한다. 두 곴다 한국인 이민자들의 수가 적은 건 마찬가지다. 위니펙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서 우린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오늘 목적지는 마니토바주를 벗어나 서스캐처원주에 있는 리자이나라는 도시다. 구글맵 기준으로 570km 정도니까 6~7시간이면 충분하다. 이젠 하루 달릴 거리가 600km 정도만 되어도 왠지 마음이 가뿐하다 ㅎㅎ
평원이 계속 이어지니 캐나다의 중부지방에 와있다는 걸 실감한다. 매니토바와 서스캐처원은 캐나다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거의 1,000km 정도의 평야가 끝없이 이어진다. 지평선을 보기 힘든 우리나라와는 정말 대조적인 모습이다. 처음에는 감탄을 자아내지만 1,000km 정도를 지평선만 보며 달려야 하기 때문에 자칫 진공상태에 있는 것처럼 멍해질 때가 있다. 자동차로 캐나다 횡단을 계획 중이라면 이 중부 평원지대를 무사히 지날 수 있는 좋은 음악 리스트와 주전부리, 그리고 잠을 깨워주는 커피를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거리를 추천해본다.
얼핏 보면 뒤에 SUV가 캠핑카에 똥침(?)을 겁나 놓으며 따라가고 있는 거 같지만, 자세히 보면 캠핑카와 SUV를 연결해서 견인하는 중이다. 보통 캐나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캠핑카 뒤에 작은 차를 하나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은 시티 근교 캠핑장에 캠핑카를 주차해두고 베이스캠프를 만든 뒤에 작은 SUV나 승용차로 시티를 투어 한다. 밤에는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하고 다음 날 또 작은 차로 여행을 떠나는 식의 여행 방법이다. 도시와 도시 사이가 먼 장거리 여행이 많을 수밖에 없는 캐나다의 특성 때문에 생긴 여행 스타일이다.
우리는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전국 번호판을 사용하고 있지만 캐나다는 주마다 다른 디자인의 번호판을 사용한다. 그리고 각 주의 번호판마다 각주를 상징하는 문구를 번호판에 새겨 놓는다. 예를 들어 내가 살았던 퀘벡주의 번호판에는 "Je me souviens", 해석하면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퀘벡주는 본래 프랑스령이었는데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에 귀속되었다. 본의 아니게 본국에서 버림받은 프랑스계 캐네디언들은 퀘벡에 남아 자신들의 뿌리 또는 그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자동차 번호판에 담았다. 다른 주 역시 저마다의 가치관이 담긴 슬로건을 번호판에 담았기 때문에 새로운 주에 도착할 때마다 번호판을 확인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여기 서스캐처원주의 번호판에는 'Land of living skies'라는 문구가 써져있다. 그래서 하늘이 참 푸르다.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는 캐나다 횡단철도. 나중에는 기차를 이용해서 캐나다를 한번 더 해보고 싶다.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를 잇는 횡단 열차는 한국돈으로 가격이 80만 원 정도 하는데 약 5일이 소요되고 중간중간 내려서 관광을 할 수 있다.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긴 하지만 침대와 식사를 제공하면서 5일 동안 캐나다의 멋진 자연환경을 질리도록 볼 수 있으니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혼자 여행을 계획한다면 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기차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하기를 권하고 싶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를 만날 확률이 훨씬 높다. 혹시 영화 <Before Sunrise>처럼 평생 잊지 못할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지 누가 알까?
여행은 인연과 우연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더욱 풍성하고 즐거워질 수 있다. 가끔 너무 여행을 계획한 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여행을 위한 계획을 세우되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캐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외딴집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저기 사는 사람은 누구랑 어떻게 살까 하는 질문이다. 사람에 매일 치어 사람에 질린다 말하면서도 사람이 없으면 또 외로워서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삶일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 사려고 해도 자동차의 엔진을 켜야 하는 번거롭고 불편한 삶일지도 모른다. TV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면 하루 종일 진짜 사람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하는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쯤은 저런 데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궁금하니까..ㅎ
풍차들의 격렬한 환영(?)을 받으며 서스캐처원에 입장했다. 차는 기름이 떨어지면 꼬박꼬박 꼬박 기름을 마시는데, 나는 나의 소중한 연료인 맥주를 며칠째 못 마시고 있다. 소포를 붙이지 못한 이유와 같은 이유로 우린 계속 맥주를 사지 못했다. 열렬한 애주가는 아니지만 맥주 한잔에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마음이 부유해지는 기분을 아는, 우린 그런 커플이다. 여행에, 삶에 한잔 술이 없다면 너무 빡빡하지 않은가? 그래.. 우린 지금 며칠째 맥주 없는 빡빡한 여행을 하고 있다. 내일은 꼭 사리라. 맥주를 사리라.
그렇게 수백 킬로미터의 캐나다 중부 평원지대를 달린 뒤에야 우리는 오늘 밤 묵을 캠핑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귀여운 로고와 게이트 옆 수영장과 놀이터가 맞이해주는 역시 따뜻한 느낌의 캠핑장이었다. 체크인을 하니 친절한 관리인이 캠핑사이트까지 우리를 안내를 해주었다. 트랙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로 따라갔다. 웅장한 캠핑카 숲을 지나 도착한 우리의 사이트는 보기엔 햇빛이 좋았지만 조금 더웠다. 역시 캐나다의 중부지방은 동부보다는 덥다. 익숙하게 텐트를 치고 사이트를 정리한 다음 줄리는 요리를 시작한다.
릴랙스 체어에 거의 반쯤 누워 완성되어가는 요리를 감상하는 나, 하루 종일 운전한 노고를 보상받는 행복한 시간이다. 물론 맥주가 한병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을 탄산음료로 달래 본다. 삼시세끼 캐나다 횡단 편 오늘 메뉴는 김치 제육볶음이다. 점차 장거리 운전과 캠핑이 익숙해지니 시간은 더욱 여유로워지고 우리의 여가시간도 길어졌다. 오늘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그간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여유도 생겼다. 텅 빈 위니펙 시내에 다녀온 게 엄청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긴 하루였다.
사이트를 정리하고 취침 준비를 하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별이 너무나 많다. 도시에서 불과 20km 떨어진 캠핑장인데도 이런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하늘이 깨끗한 캐나다는 정말 축복받은 나라다. 서둘러 삼각대를 가져와 카메라를 세팅해본다. 그리고 모기와 진한 피를 나누며 캐나다의 여름 밤하늘을 마음 것 감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