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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 10년, 역이민을 꿈꾸다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다.

2020년 9월, 어릴 때부터 함께 살며 나를 키워주셨던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한국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를 퇴근하는 차 안에서 받고,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났다. 정신을 붙잡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찾아보는데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타도 발인 예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펜데믹으로 비행기 편이 감소하였고 입국 후 자가격리 등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이 있었다. 결국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분향소는 여러 곳에 차려도 된다고 하여 작은방에 국화꽃과 함께 할머니 사진을 모셨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3일 동안 그 방에서 할머니 사진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것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나 현타가 왔다. 나름 열심히 달려왔던 내 인생, 한국을 떠나 호주와 캐나다에서 보낸 10년의 세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자꾸 의심이 들었다. 나는 내 삶을 다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에서도 한계를 많이 느꼈다. 영사관에서 근무하는 게 밖에서 보기엔 양복 입고 정시 출퇴근에 정년 보장되니 안정되고 번듯해 보이지만, 한국 조직 특유의 권위적인 서열문화 등 고쳐야 할게 아직도 많이 있다. 운 좋게도 입사 초기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외국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시 한국 조직에 들어가려니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생각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회사 분위기에 한국 조직문화도 많이 바뀌었구나 느꼈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이상한 사람 한두 명은 꼭 있기 마련. 나는 하필 그 두 명이 나의 직속상관이었을 뿐이다. 탄핵으로 전임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교체가 되었을 때 나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정치 성향을 떠나서 살아있는 권력도 죄가 있으면 국민들의 힘으로 자리에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아마도 국민과의 소통을 내세우며 전과는 확실히 다른 정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부도 결국엔 전정부와 하는 짓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선거캠프에 있었던 사람들을 여기저기 낙하산으로 꽂아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하나였던 나의 상관은 평생 세상을 책으로만 배운 사람 같았다. 말과 행동이 달라 명확한 주관이 없는 사람 같았지만 항상 아랫사람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자신이 원하던 것과 같기를 바랐다. 부임 첫 해에는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는 듯하였으나 먼저 파견되었던 영사들이 임기를 마쳐 떠나고 새로운 영사들이 부임하자 독재자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더 문제는 중간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영사관 마지막 근무 2년 동안 우리 조직은 과거로 회귀했다. 옛날 군대처럼 까라면 까라는 식의 업무가 많아졌다. 관저의 화장실 변기 수리나 제설작업을 행정직원이 직접 하면 어떠냐고 제안하고 코로나19로 인해 본부에서는 직원들의 유연근무를 유도했는데 총무 영사인 그는 업무 비효율을 이유로 들며 직원들의 유연근무 신청을 거절했다. 내가 내 휴가를 쓰는데 휴가계획서에 휴가 사유를 쓰고 대리 근무자에게 서명을 받게 할 때는 정말 화가 났다. 재외공관 행정직원들에 대한 갑질 논란이 일면서 외교부는 2017년부터 많은 부분을 개 시원하려 노력하였고, 특히 우리 영사관은 공관 내 분위기가 참 좋았었던 터라 더 아쉬웠다. 나도 근무경력이 5년째가 되고 나이도 마흔이 다 되어가다 보니 지금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책임감을 느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 드는 일이 있으면 매일 영사의 방문을 두드렸고 외교부 게시판에도 꾸준히 글을 쓰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나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었는데 점차 방어적으로 바뀌어 갔다. 문득 그런 내 정신상태가 너무 병들어 바닥까지 내려가 있다는 것을 느껴 5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그리고 캐나다 온 뒤 처음으로 두 달이란 긴 시간을 한국에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다. 문득 부모님이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모님은 무릎 수술을 하셨고 아버지는 허리 수술을 해서 더 이상 함께 산에 오를 수 없었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은퇴를 하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했다. 평생 일만 하시느라 특별한 취미가 없으신 두 분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 수 있도록 함께 새로운 경험도 했다. 어머님은 자동차 운전면허에 도전하고 나는 오토바이 면허에 도전하기 위해 함께 운전학원을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추억이다.


https://youtu.be/NJLXx_gCpU0


동생이 아이를 나서 조카가 생겼다. 내가 무언가를 다시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고 순수하게 뭐든 주고 싶은, 이런 게 '내리사랑'이구나를 실감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조카바보에 등극했다. 친한 형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술 한잔을 기울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다들 가족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정작 자신의 자식에게 좋은 아빠 될 시간이 없었다. 집에 왔는데 유튜브로 구슬픈 트로트를 틀어놓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보고 또 한 번 눈물이 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울어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힘들면 들어와서 살아"라고 하셨다. 나도 외국에서 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동안 뭘 한 건가 하는 생각이 그날 밤 짙게 들었다.



짧으면서도 길었던 두 달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와 그간 있었던 일을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캐나다 여행기 "오늘 밤 우리 어디서 자지?"를 출간했다. 현재는 두 번째 책을 쓰며 앞으로 6개월은 한국, 6개월은 캐나다에서 지낼 수 있는 디지털 노매드 생활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https://www.bookk.co.kr/jjun20243


나처럼 외국생활을 꿈꾸는 사람에게 '이민'은 정말 큰 도전이지만 또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사를 해외로 할 뿐이다. 20~30년 사용하던 문화와 언어,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살기를 결심하는 데는 정말 큰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분명히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 또한 많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들끓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보기로 했다. 정말 멀고 먼길을 돌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았다.


이민은 절대 도피성이 되어서는 안 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큰 그림을 보면서 해야 한다. 나중에 수정될 지라도 대략적인 큰 계획을 세우고 작은 계획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실행해 가면 된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그리고 딸린 가족이 많을수록 그래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고 그래서 다들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어 있다. 언어의 장벽만 없다면 한국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세계 어느 인력시장에 내놓아도 일등 일꾼이 될 거라 나는 장담한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울 자신 있는 사람들이 외국에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면 나는 항상 그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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