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 아이가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분명 사랑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사랑하고 싶었다. 아니 받고 싶었다. 외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 나는 사랑을 주는 법을 잘 몰랐다. 그래서 항상 받고만 싶어 했다. 여자 친구가 아니라 엄마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다 애야"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다"는 아니다. 그때에 맞는 정확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육체는 성장해도 마음은 그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없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나는 내가 막다른 길에 몰려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해도 내 손을 꼭 잡아줄 한 사람. 내 모든 걸 용서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항상 그리워했고, 그래서 그런 어머니 같은 여자 친구를 원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면서 제일 가까운 대인 관계는 아마 연인일 것이다. 제일 깊은 곳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과 경험을 공유한다. 학창 시절의 친구관계는 여러 명이 함께 어울리지만 연인과의 관계는 누군가와 단둘이 관계를 만들어 가는 본격적인 대인관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연애를 시작한다. 인생 최초로 보는 커플이 바로 부모기 때문이다. 경험상 나처럼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다 주거나, '절대' 다 주지 못한다. 결국 두 패턴 모두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다 주는 사람은 주는 만큼 다시 되돌려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방법도 속도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내가 준만큼 되돌려 받는 효율적인 사랑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다 주는 사람의 연애는 상대방에게 너무 의지하게 된다. 다 주지 못하는 사람은 다들 예상하겠지만 서로 충분한 신뢰를 쌓는데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마음을 활짝 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던 친구던 다 주는 편이었다. 덕분에 대인관계에서 (의도적이던 그렇지 않던)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반대로 장점도 있다. 최소한 인연의 관계가 끝났을 때 후회가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었기 때문에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도 관계의 실패 속에서 사람은 학습을 하므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간다. 발란스를 맞춰 나가는 것이다.
한때 나도 내가 엄마 없이 자란 사실을 일종의 치트키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관계에서 어떤 잘못을 해도 "나는 엄마 없이 자랐으니까"라는 말 한마디면 다 용서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스스로를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받는 위로도 중요하지만 결국에 내가 나 스스로를 제일 많이 위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않아 본 아이는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모른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