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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모님의 이혼 후 제일 겁났던 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이혼하셨어"


이 말을 누군가에게 처음 할 수 있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 '엄마'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가장 펼쳐 보기 힘든 책의 한 페이지였다. 나와 우리 가족의 암묵적인 금기어였고 쉽게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말이었다. 언제쯤부터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 말을 하기 전 제일 필요했던 건 상대방이 전과 변함없이 나를 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니 가장 친한 친구부터 그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모든 일이 그렇던 그 처음 한 번은 매우 어렵다.  


엄마가 집을 떠나고 제일 겁이 났던 건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이 학교에 가고 똑같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엄마가 항상 집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게 제일 쉽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친구들이 너네 엄마는 뭐 하셔?라고 물어보면 나는 머릿속에 가상의 엄마를 그렸다. 항상 바빠서 학교 학부모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바빠서 스승의 날도 아무런 선물을 보낼 수 없었다. 중학교 진학까지는 학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 가끔 난처했지만 상급학교로 갈수록 그런 것들이 점점 줄어 편했다. 그래도 친구들에게 엄마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여 나는 여전히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전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가 엄마 대신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다.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 한 번은 학교 점심시간에 엄마를 만나기로 했는데 집에 말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그대로 들고 등교했다. 도시락을 먹지 않고 집에 다시 가져가면 왜 먹지 않았는지 물을까 봐 제일 먼저 교실에 도착한 나는 친구들이 등교하기 전에 화장실로 가서 밥을 버리고 도시락을 비웠다. 점심시간 만난 엄마에게는 그 사실을 이야기했고, 엄마는 또 아빠에게 이야기했고 아빠는 다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혼이난 건 아니었는데 괜히 서럽고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그때 할머니 도시락을 버린 게 아직도 죄책감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중간고사 기간에 엄청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빠가 엄마에게 연락했는지 하교시간에 학교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에게 삐삐가 생겼고 연락처를 받았는데 부주의로 잊어버렸고 그 뒤론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한 번은 우연히 길에서 엄마를 마주쳤다. 역 안에 있는 만남의 광장이었는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며 걸어가던 내가 시선을 느껴 바라봤는데 바로 엄마였고, 순간 너무 당황한 나는  친구를 찾는 척 방향을 틀어 도망쳐 버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상처를 받을 것 같은 기억은 아주 깊은 곳에 넣어버리곤 한다. 나 또한 한동안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내 컴퓨터에 로그인되어 있던 여동생의 이메일을 보게 되었는데 동생은 그동안 엄마와 이메일로 연락을 하고 있었고, 이메일에 어렴풋이 그날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그와 관련하여 내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날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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