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가깝다. 어느새, 예기치 못한 곳에서 숨죽이며 자라나 내 숨을 조이는 암을 닮아있다. 그렇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낼 재료이기도 하다. 이미 내 곁에 다가와 있는 이놈들을 어떡하나. 그저 조심, 조심 입을 무겁게 만들면서 견디는 것이다.
두툼한 책들은 항상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품성을 닦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처럼 그런 마음으로 걷자. 홀로 남겨진, 이 외로운 시간, 가늘고 긴 외줄 위를 걷자.
먼 곳을 보지 말자. 지금 흔들리고 있는 내 발밑만 바라보자. 손을 좌우로 펼치고, 균형감을 잃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머리나 가슴에 두지 말자. 가볍고 가벼운 내 존재의 중심을 가장 낮은 발걸음에 두자. 아니면 손에 두자. 지식도 욕망하는 감정도, 권력 의지도 이 시련의 골짜기를 건너는 징검돌은 아니다. 낮은 자세 곧 겸손, 온유, 진심, 성실함만이 지금 이렇게 외로운 나의 시련 앞에 단단한 징검돌로 앉힐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빠른 급류가 흐른다 해도 떠밀려가거나 이탈하지 않을 만큼 안전하고 무거운 징검돌로 남을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시련이란 신이 죄인인 나를 크게 사랑하심으로 베푸신 채찍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불교적 세계관인 자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만약 내가 시련 중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그런 날이 도착해 있음을 감사해하면 어떨까.
쉽게 믿을 수 없지만 견디면 도래할 그날, 그때, 더 빛나는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나. 그런 희망이 필요한 인생의 섭리를 한번 믿어보면 어떨까. 아니, 믿고 인내하며 견디자. 단순히 견딘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별과 달과 바람이 언제나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바위가 모든 폭풍을, 폭염을 견디는 것처럼 견디고 보자. 잠들어 있는 열정을 깨어 일으키고 창의적인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자.
새끼 고양이 같은 조용한 걸음으로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시련의 골짜기를 건너 내자. 시련의 골짜기를 건너 줄 징검돌을 놓으며, 내가 내 앞에 놓고 있는 징검돌을 의지하며 건너보자. 건너면, 그곳이 어디든 내가 발을 디딜만한 단단한 대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