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결정

by 김헌

존재감의 상실, 똑똑한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존재의 무게감은 시간 속에서 닳아진다. 나는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내게 물어볼 수 있다면 존재는 증명된 것이다. 그것조차 의미 없이 여겨진다면 내가 가진 의지와 자존감은 가장 작은 단위의 무게만으로 숨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어쩌면 어떤 목표도, 어떤 의미도 사라지고 없는 삶의 무게가 존재의 자존감을 대신해 평행을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면 아침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어떤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해도 그것만으로도 살아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인내, 인내, 오직 푯대를 향해 오래 참고, 견디라고 하는 말들. 내일이라는 것이 진정 우리 것도, 내 것도 아니라면, 그 말이 진리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 정신은 고여 있는 물이다. 분노도, 의욕도 없는 잔잔한 우물. 빛도 어둠도 아닌 그늘만 가득한 곳. 가끔 바람만 내 정신의 물 위에 내려왔다가 사라진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간 것일까. 내가 불러서 온 것일까. 내 음성에 담긴 비루한 냄새에 긍휼함이 발동한 것일까. 나는 지금 움직이지 않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의미를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둠 속에 하나의 어둠으로 섞인 모습이다. 웃음도 울음도 내 것이 아닌 것이라고 내가 소리친다.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짖는다.


우리는 살아온 것이 아니라 흘러온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이루었다고 스스로 위안했던 삶은 전부 가짜다. 엉터리로 살았다. 허무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살아온 것 같은 물 위에 그려진 그림자이다. 심장도 없는, 영혼도 없는, 사랑도 없는, 은총도 없는, 은혜도 없는 가시나무다. 바위 위에 선 가시나무다. 일순 죽어버린 마른나무.


나는 입이 없다. 말은 마음속으로 숨어들었다. 진흙을 파고들어 간 작은 애벌레, 매미의 시간을 살고 있다. 땅속에서 숨죽이며 죽음처럼 고요한 잠을 자야 한다. 겨울이란 잠시 머무르는 노래처럼(우리 영혼에, 우리 심정에) 긴장과 이완을 번갈아 가며 선물한다. 움츠린 몸에 햇살이 오면서 녹고, 녹았던 혈관이 손끝에서부터 다시 언다. 그때 겨울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먼 시간이 오면 겨울의 기억이 가장 단단히 남아 있을 것이다. 얼음의 결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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