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유 Mar 17. 2023

지나친 간섭과 게으른 방관 중 무엇이 더 난해한가

상실된 이타심 : 단정 짓는 삶[斷定]




우리가 원만한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대할 때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스트레스를 오롯이 내가 다 버티면서 타인의 할당량까지 내가 묵묵히 해버리는 것이 올바를까 한마디 따끔하게 하는 게 올바른지는 생각한다 한들 그리 쉽게 사칙연산의 덧셈처럼 삶의 대한 연속적인 질문 속에서 적확한 답이 도출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단정’ 이라는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초고를 다 작성한 후에도 충분히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불특정 다수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잡히지 않는 하늘에 늘 존재하는 별처럼 항상 내 마음속에 염두해 두곤 했던 주제였다. 하늘에 늘 떠 있지만 잡히진 않던 생각에 불과했던 주제를 다루게 되어 안도감도 잠시 금방 드리워진 영국에 비구름처럼 어려운 점들이 겹겹이 쌓여만 갔다.

이 주제의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점을 꼽으라면 모든 작가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충분히 타당성은 유효한데…. 어떻게 풀어내야 하지’ 일 겁니다. 저도 그런 고민을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는 한 작가로서, 스토리텔링을 중요시 생각하는 한 독자로서도 중요한 부분일 겁니다.

자. 그렇다면 왜 단정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하는지 묻는다면 요즘 시대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이타심은 상실하였으며 모든 것을 개인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는 사고방식 즉. 단정 짓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단정 짓는다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세계관’에 침범한다. 라는 표현을 착안하면서까지  과감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어디까지의 개입이 타당한지, 어디서부터가 간섭인지는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서 미묘한 균형을 타고 버텨야 하는 일종에 묘기에 가까울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일인 거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어느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

누군가에겐 좋은 상사 다른 누군가에겐 피하고 싶은 상사가 되는 것

누군가에겐 한 없이 배울 것이 많은 사람, 반대로 나보다 선배이지만 배울 것이 정말 없어 보이는 사람의 기준은 단정 짓는다는 행위로 인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있다가 문에 의해 연속성을 박탈당한 엘리베이터의 내, 외부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들어 한 없이 나 자신이 편협한 사고방식과 기존에 존재하던 정의들에 입각하여 오롯이 앞만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주위는 둘러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단정 짓고 나 자신의 생각과 의미를 상실할 뻔했던 아주 짫지만 느낀 것이 많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젤리를 만들어야 할 메뉴 작업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단순히 젤라틴과 한천과 전분의 차이는 질감의 차이이다. 라는 참고자료 정의에 매몰되어 1차원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도저히 내가 원하는 질감을 얻기 위한 답이 나오지 않던 찰나에 배울 점이 많다고 느끼는 선배께서 ‘ 너무 매몰되지 말고 단정 짓지 말라’라는 말을 하고 내가 그동안 찾은 정보들만을 너무 맹신하고 매몰되어 단정지은 탓에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많은 실험을 통하여 느낀 것은 한천을 쓰냐 전분을 쓰냐 젤라틴은 쓰냐 도 중요하지만 물을 얼마나 넣을 것이냐 얼마나 끓일 것이냐 시럽의 비율을 얼마만큼 넣을 것이냐가 결국 젤리의 질감을 결정하는데 더욱 중요한 [관점] : ‘point of view’였던 것입니다. 즉. 윤활제 역할로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물의 농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매몰되었던 나 자신이 한탄스럽거나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단정 지었던 순간들에서 또 다른 인생의 미학을 찾았기 때문이죠 만약 그때 한천을 써야만 양갱 같은 질감이 나와!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면, 전분을 써야만 쫄깃한 질감이 나온대!라고 단정 짓지 않았더라면 저는 여전히 모든 것을 타인이 정의해 놓은 것들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 척. 점. 에. 서. 있.었.을. 겁. 니. 다. 이렇게 쓰고 보닌 사람 사는 세상은 참 아이러니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단정을 지어봐야 단정 짓지 않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타인에게 간섭을 해봐야 적어도 나는 타인에게 간섭을 하지 않기 위해  상대를 더 헤아리려 하는 마음을 배양하게 되며, 실수를 해봐야 다신 실수를 하지 않게 되고 헤어짐을 겪어봐야 공허함과 외로움을 마주하고 이해하게 되며 혼자서도 풍요롭게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듯이 모든 인생의 그릇을 확장시키는 과정은 결국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사이 모든 선택과 결과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는  자기만의 ‘point’들을 잡을 것은 잡고 놓을 것은 놓아주는 ‘catch and release’의  연속이란 생각을 합니다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번을 계기로 확실하게 느낀 것은 모든 것을 단정 짓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을 대할 때 사람을 대할 때 후임을 대할 때 작업을 할 때 모든 순간순간에 다양함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린 편협함과 이기심에서 [‘단정’ : 斷定] 이라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저 역시도 되어가려고 노력하는 완전하지 못한 일부의 존재일 뿐입니다. 꽤나 상당한 시간과 굉장한 노력이 요구되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내게 있는 오만과 편견 증오와 분노, 질투와 욕심은 놓아주고 선망과 배려 이타심과 배려심, 수용과 포용하려는 마음가짐은 제가 지금껏 인생을 살아온 가운데 후. 천. 적. 으.로 익혔던 몇 가지 노력 중에서도 아마 가장 유익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안타깝지만.

 

단정 짓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그 사람의 몫까지 더 짊어지는 방법뿐.


우리가 공존하는 이 세계는 여러 가지 퇴적물들이 쌓인 퇴적암처럼 층층이 겹겹이 서로가 알 수 없는 모난 모양들로 구성 돼 있듯이 여러 가지 방식과 가치관으로 성립된다고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일반인이라면 단정 짓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지 고민해 본 적이 100%의 확률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에게 혼쭐 나줄 방도는 딱히 존재하지 않으며 오롯이 내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중층적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패스추리처럼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의 허황된 세계가 접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뭐가 있을까요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내가 더 먼저 들어왔으니까… 형이니까.. 혹은 본인이 업무를 우월하게 잘한다고 생각하여,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으니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의 명민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깎아 내리면서까지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 보다도 자기 자신, 내면에 깊은 울림에 더 몰입해야만 교활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서 단점을 찾아 자신의 장점과 비교하는 것은 소설로 치자면 타인의 ‘위기 전개 과정’을 본인의 ‘화려하 결말’과 비교하는 셈인 거죠.

이런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장점을 타인의 단점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저 그 사람이 잘 못하는 부분들까지 우리가 짊어지고 더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를 끙끙 앓고 고민을 해도 무언가 적확한 해답이나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땐 그저 체념하고 우리의 그릇을 더 키우는 것 이외에 더 해야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정신건강에도 이로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하자면 과일의 껍질을 깎다가 살짝 닿기만 해도 베어버리는 아주 날카로운 과도와도 같았습니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넌 이런 게 잘못 됐어, 얜 이런 것도 못하면서 훈수지?라는 날카롭게 날 선 비판을 아무렇지 않게 했겠지만 근래 들어 드는 생각들은 그와는 완전 반대의 생각들이 나의 정신을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타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질타로 꿇려 내가 원하는 바를 타인에게서 얻는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진정한 승리일까? 그런 행동이 정말 상대를 고쳐줄 해답이 되느냐  끊임없이 되물어 본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정말 영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절대 티 내지 않으며 원할수록 조금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명민함을 갖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수록 상대에게 티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본인의 실력을 탓하며 스스로의 복기를 한없이 하며, 상대가 알아서 깨닫고 행동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거든요. 원하는 것들은 티 낼수록 멀어진다는 것을. 자신의 능력을  제련하는 사람들은 절대 누군가를 단정 짓고 판단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던 답들을 주위를 둘러보며 나에게 샘 같은 존재 찾기 위해 곡괭이와 망치를 들고 부지런히 나 안에 벽을 깨고 작은 실낱과도 같은 구멍을 뚫지 않으면 편협한 사고력에 매몰되고 새로운 문맥을 구조적으로 지어나가는 창작의 수원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입장인 저로서는 정말 누군가를 바꾸고 싶다면, 역설적이지만 내 자신을 더 가꾸어 그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가장 명민한 해결방안일지도 모르겠네요.

저의 지론을 너무 에둘러 말했지만 어느 부분에선 나사를 살짝 풀고 중요한 부분에선 나사를 조여야만 조인 부분이 조였다는 티가 나기 때문에 조금은 에둘러 말한 것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언제나 곁에 가까이 있는 것들에 시선을 두고 주의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해답은 ‘나’ 에게 있었던 적이 많았더라고요. 내 안에 잠식 돼 있는 깊은 물속에서도 자립적으로 유영할 수 있는, 그리고 물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파도와 혼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제도화된 의식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가 제도화된 암벽을 깨 부수고 깊숙이 파고들어 새로운 미지의 땅을 밟는 것일 뿐. 일. 지. 도. 모르겠습니다. 그 미지의 땅이 내 인생에 있어 유한한 공간이 될지 무한한 우주의 세계로 남을지는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가치를 목표로 새로운 공간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 될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paraphras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