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빛 Oct 29. 2022

짜조와 스킨로션-1


나는 기숙사에 대한 로망이 있다.

기숙사 친구끼리 친해져서 같이 밥도 해먹고, 통금시간에 늦을까봐 질주도 해보고, 밤늦게 같이 얘기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왔어도 나 정도 거리로는 기숙사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학교 앞에서 하숙생 생활을 계속 했었다.


그런 기숙사 생활에 대한 로망은 북경에 어학연수로  이후에야 산산조각 났다. 나는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이  맞으려면 정말 엄청난 운이 따르거나, 인내심이 엄청나야 한다는 것을.




일단 북경에 내려서 발견한 것은 튼튼했던 캐리어 바퀴 한쪽이 박살이 나있는 광경이었다. 거의 20Kg가 훌쩍 넘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택시를 타려고 보니 비가 온다. 놀랍게도 이 날 이후로 북경에 오후에 비가 오는 날은 없었다.


바가지를 씌울까, 혹시 장기가 털릴까 불안해서 부릅떴던 눈은 스르르 감겼고, 택시 아저씨는 문앞까지 태워다주시는 것도 모자라서 무거운 캐리어도 내려주셨다.


비를 뚫고  엄마 학교의 교생선생님의 도움으로 여차저차 수속을 마치고  기숙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어두운 조명, 시트에는 세탁은 했는지 의문인정체모를 얼룩들. 게다가 캐리어를 열어보니 박살난 바퀴쪽으로 물이 들어와서 옷이 흙탕물이 젖어있다.


너무 진이 빠져서 뭔가 해볼 겨를이 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노크 소리에 뒤돌아보니 키가 훤칠한 금발의 여자가 서있다. 그녀는 반갑게 웃으면서 자기 이름이 알리샤고,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기숙사라고 했지만 가정집 같았던 이 곳에는 방이 2개였고, 작은 방에는 알리샤가 그리고 내가 있는 방에는 한국인이 한 명 더 산다고 한다.


알리샤는 화장실을 보여주었다. 구조가 정말 독특했는데, 화장실 변기가 있었고, 변기통 위에 쇠 파이프가 세로로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저게 샤워기다. 샤워 헤드도 없었다. 그냥 파이프 끝에서 물이 나온댄다.알리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을 한사바리를 한다. 저기서...샤워를..?


약간 머리가 멍해져서 잠시 쉬겠다고 방에 들어와서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는데 정말 사근사근했다. 북경에 온 지는 한 달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밥을 못 먹었다고 하니까 컵라면을 선뜻 내어줬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온 천사인 줄 알았다.


밥을 먹고 나서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담배를 피기 전까지는.


너무 놀라서 방은 정말 아닌 것 같다고 하니까 부엌에서 핀다. 물론 담배냄새가 다 들어온다. 나는 후각이 정말 예민한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사는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며 너무 피곤해 일단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변기 끝에 서서 쇠파이프에서 나오는 냉수벼락을 맞고 더욱더 마음이 확고해졌다. 얼굴이 일그러져서 나오자 알리샤가 ‘아이고 저런’ 하는 표정이다. 냉수밖에 안나온다고 한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나한테는 안씻는게 나을 정도로 싫은 일이었다.


알리샤의 말로는 반대 편에 있는 국제기숙사는 시설이 훨씬 좋다고 한다. 하지만 TO가 없다며 자신을 여기로 보냈다고 말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은 국제 기숙사로 신청하고 돈도 똑같이 냈다고 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날 부터 우리 둘은 매일매일 아침 저녁으로 안내데스크에 가서 직원과 실랑이를 했다. 똑같은 교환학생인데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여기로 보냈는지, TO가 곧 난다고 했는데 대체 그게 언제인지.


그렇게 따지고 실랑이를 벌인지 이주일 만에 우리는 겨우 국제 기숙사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직원에게 같이 대항하던 과정에서 아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룸메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리샤는 1인 룸을 선택해서 나는 또 혼자 남았다.




국제 기숙사는 너무 깨끗하고 좋았다. 온수도 나오고, 침대도 깨끗하고, 무려 책상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짝꿍찾기 여정은 끝난게 아니었다.


국제 기숙사 첫 짝꿍은 케냐에서 온 친구였다. 첫 몇 주간은 영어로 대화하면서 가까워졌다. 케냐에서는 밖에 누우면 별이 쏟아질 것 같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엄청난 비욘세 팬이어서 각종 TMI를 비롯해 플레이리스트를 영업당했고, 한동안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비욘세 노래일 정도였다.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이 친구의 반전은 방에 남자친구를 데려오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어느날 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침대에 웬 남자가 앉아있다. 남자친구라고 한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아무래도 남자가 방 안에 있으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도 좀 민망하고 신경이 안쓰일 수가 없다. 게다가 안간다. 낮에 왔는데 밤 늦게까지 그렇게 가라고 눈치를 주고 슬쩍 얘기해도 살살 웃으면서 안간다.


내가 너무 사상이 아시아적(?)인가? 서양에서는 원래 한방에 이렇게 누가 있어도 남녀가 같이 있나? 아 물론 내가 있으면 둘이 스킨십을 하지는 않는다.


알리샤에게 얘기하니까 기겁을 한다. 당연히 숙박시설을 가든, 카페를 가든 하는 게 맞다고 하고, 옆에 있던 그녀의 러시아 친구도 어처구니 없어 한다.

(물론 한국 언니들은 당연히 듣고 당장 방 바꾸라며 난리가 났다)


나는 정말이지 또 방을 옮기고 싶지 않아서, 룸메한테 되도록 부드럽게 다른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이 어떻냐고 말했고, 그녀는 화를 내며 울었다. 아시아인이 다수인 이 곳에서 흑인 두명이서 밖에서 데이트하는 게 쉬운 줄 아냐, 그럼 매번 밖에서 돈 쓰면서 데이트 해야 하냐, 나는 돈 없다. 대충 이런 맥락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사람이 눈 앞에서 우는데 위로해 줄 마음이 한톨도 안들고 마음이 차게 식었다.


데스크 직원에게 물어보니 규칙상으로는 물론 남녀가 같이 지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아마 경고 정도에 그치게 될 거라고 했다. 데스크 직원은 중국인으로, 사정을 듣더니 내가 딱해보였는지 대신 다른 좋은 방이 나면 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두번째 룸메이트와도 안녕이다.

내가 짐을 주섬주섬 싸는 동안 그녀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정말 이제는 내가 다 맞춰줄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지며 새로운 방에 심호흡을 하면서 들어갔다. 진짜 두번 다시 짐 안싸고 싶다는 마음으로.


세번째 친구는 태국인 친구이다. 없는 친화력 있는 친화력을 다 쥐어짜서 쾌활하게 인사하는데 약간 어색해 한다. 아, 내향적인 친구인 것 같다. 겨우 서로 간단하게 통성명만 하고 필요한 것만 꺼내려는데,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중국어로 말한다.


내가 북경에 처음 갔을 때는 정말 완전 초급 수준이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국 뉘앙스가 중국어에 섞이니 더욱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내가 잘 못알아 듣겠다고 하니 다시 인상을 쓰고 전자 사전에 쳐서 보여준다. 아, 조용히 해달라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방안에는 적막만 감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방이 마치 진공상태 같다. 한국 독서실에서도 숨 쉬는 소리는 나고 필기 소리는 나는데.


나는 숨을 죽이고 아 잘됐다, 차라리 공부나 하자하고 숙제를 했다. 그러다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내가 내 자리에 앉자마자 룸메가 다시 화장실에 슥 들어가더니 나온다. 뭐지? 지금 체크한 건가?아니겠지.


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역시나 였다.

저녁에 샤워하고 나오자 또 전자 사전을 들이밀며 뭐라고 하더니, 이제는 초 단위로 한숨을 쉰다. 내가 중국어는 못해도 저건 알겠다. 너무나 들으라고 쉬는 데 모를리가.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2인방을 1인방처럼 쓰기 위한 전략이었나 싶기도..)


지금까지의 룸메이트 경험을 미루어 봤을 때, 안맞아도 계속 참아봤자 서로에게 스트레스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에 나는 짐도 못 푼 김에 그냥 다른 방으로 옮기기로 결심했고, 데스크 직원은 이번엔 이유도 묻지 않았다. 마침 다행히 남는 방이 또 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짐을 푼게 없어서 거의 10분 만에 초고속으로 짐을 쌌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잘가라고 또 전자사전에 쳐서 보여준다. 야, 나도 그정도 중국어는 할 줄 알거든?




네번 째쯤 되니 이제 희망도 기대도 없다.

이번에도 별로면 바로 짐싸야지, 하는 마음으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는데 햇살이 챠르르 들어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따스한 공기와 끝에 살짝 섞인 이국적인 향신료 향.


무뚝뚝한 표정의 단발 파마머리 언니가 책상에 앉아 나를 돌아보며, “니가 데스크에서 말한 새 룸메이트구나” 라고 말했다.


먼 여정 끝에 찾은 나의 기숙사 짝꿍의 등장이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08화 피카츄와 코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