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의 사랑은 형태가 없었다. 외할머니의 사랑이 피부로 직접 느껴지는 따뜻한 햇살 같았다면, 할아버지의 사랑은 구름같았다. 몽실해보이지만 들어가면 형태없는 물방울에 가득 에워쌓이는 구름.
표현은 많지 않으셨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지는, 아무리 여럿이 집에 방문해도 “00이 왔냐~”하고 내 이름만 불러주시는 그런 사랑.
지금은 너무나 분명한데 어렸을 때는 직접적인 표현이 워낙 적으시니 나를 싫어하시나, 역시 남동생을 더 좋아하시는 걸까 했다.
그리고 나는 딱 하루를 기점으로 할아버지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나는 허약체질 넘버 원이었다.
4살때는 폐렴으로 한참 입원해있었고, 그 이후로는 수두를 포함한 온갖 전염병이 나를 스쳐갔다. 365일 중 질병에 안 걸린 건강한 날이 손에 꼽았다.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 못 다녀서 사람 구실을 못할까봐 매일 걱정하셨다고 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언갈 잘 해낼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체육시간에는 온 힘을 다해 달려도 절대 선착순에 들 수 없었다. 국어시간에는 집중해보려고 노력해도 선생님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는 어느날 부터인가 못되먹은 목소리가 생겼다.
‘어차피 해봤자 안된다니까’
‘아프잖아, 포기해’
그리고 정말 아플때는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 없으니 나도 하다하다 포기해버리곤 했다. 처음에는 분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그게 당연하지 난 아프니까, 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걸려 본 병들 중 가장 지독한 병은 가성콜레라 였다.
이름도 생소한 가성콜레라는 콜레라와 유사하지만 콜레라는 아니어서 ‘가성콜레라’라고 한다. 이 병에 걸리면 연속으로 계속해서 토를 하고, 구토의 수준은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거의 버튼누르면 바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사촌동생이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사촌동생의 동생이 걸렸고, 이모도 걸렸다. 나는 제발 피해가길 간절히 바랐지만 밑바닥인 나의 면역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증상이 낮에 나타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기억이 흐리지만 게다가 그 날은 엄마도, 할머니도 장례식이었는지 여행이었는지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이른 저녁 할아버지와 나만 덩그러니 남아서 할아버지는 티비를 보고, 나는 엎드려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속이 울렁이며 구토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나...너무 안좋아”
하고 토했다.
할아버지는 “아이고...야가 왜이랴”하고 탄식하면서 걸레로 토사물을 닦았고, 나는 닦으실 틈도 없이 계속 토했던 거 같다. 네번인지 다섯번인지 토하니 위액이 나오고 몸에 힘이 없다.
할아버지는 안절부절 하셨다. 뭐라도 먹여야 하는데뭘 먹여야 할 지도 모르겠고, 죽을 끓이실 줄 모르니 밥에 물을 말아서 먹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원래도 밥 먹기를 싫어해서 엄마가 애원해야 그제서야 세숟갈이나 먹던 나였다.
“싫어~안먹고 싶어 할아버지”
“아니 먹어야 들 토하지“
“싫어~...”
“먹으라고!!!!!먹어야 나을 것 아니여!!“
평소에 말씀이 적으셨던 할아버지가 고함을 치셨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울면서 물만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구토 2차전이 시작되었지만.
토를 거의 스무번 넘게 해서 열이 오르는 건지, 할아버지가 평소에 약간 쌀쌀할 정도인 안방을 거의 찜질방 수준으로 난방을 켜서인지 머리가 무겁고 어질어질했다.
낮이었다면 약이라도 받아왔을 텐데 약도 없고, 약국도 닫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응급실에 갔어야 했던 거 같은데, 그 당시에는 정말 어디가 부러져야 가는 곳이 응급실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뜨끈뜨끈한 노란색 장판에 볼 한쪽을 대고 나는 힘없이 누워있고, 할아버지는 구부정하게 앉아서 졸린 눈으로 티비를 보시다가 나를 한번씩 흘끗흘끗 애가 살아는 있나~하고 보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요새 수지침을 배우는데 말이여” 하신다.
“아 싫어, 아프잖아”
“아니, 효과가 있다니까, 진짜로“
“무서워, 싫어”
“한번만 해보자,응? 안아프게 놔줄게“
결국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손을 잡혀서 수지침을 맞았다. 몸이 안좋아서인가 정말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아팠는데, 신기하게 속이 약간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폭신한 이부자리에 누웠는데, 진짜 살 만해졌는지 갑자기 잊고 있었던 숙제 생각이나버렸다.
말을 하면 안됐는데.
“할아버지 근데 있잖아...”
“응“
“나 한자 숙제가 있는데 어떡하지? 선생님이 나 혼낼까? 근데 이렇게 아팠는데? 진짜로 혼날까?”
할아버지가 어이없으신 듯 작게 한숨을 내쉬시더니,약간 결연하게,
“가져와봐, 할애비가 알려주게” 라고 하셨다.
안방 밖은 거의 다른 세상이다. 할아버지는 난방을 대체 얼마나 트신 걸까. 한문공책과 연필을 가져오는 동안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썰어놓으신 사과 몇쪽을 부엌에서 가져오셨다.
그렇게 아주 늦은 밤 꾸역꾸역 한자를 썼다. 머리는 띵하고 여전히 어지럽다. 사과를 한입 아삭 베어물고, 또 개발새발 한자를 슥슥 쓴다. 졸린 것 같으면 할아버지가 한자공책을 휙 뺏으시더니 퀴즈를 내셨고, 연필이 뭉개져서 획을 못쓴다 칭얼거리면 아무말 없이 사각사각 깎아주셨다. 또 속이 안좋다 하면 할아버지는 책을 들여다 보시면서 한땀 한땀 수지침을 놓으셨다.
그렇게 결국 아득바득 한자 숙제를 끝내고 잠이 스르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그날 뿌듯했다. 몸이 그렇게나 안좋았는데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이, 그 별거 아닌 게 엄청나게 기뻤다. 나도 하려고만 하면 꼭 해낼 수 있다는 걸, 그걸 할아버지가 알려주셨다.
다음날, 결국 조퇴하고 약을 타서 일찍 집에 왔다.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여니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고, 할아버지는 피곤하셨는지 입을 살짝 벌리신 채 주무시고 계셨다. 그리고 나도 옆에서 웅크려서 단잠을 길게 잤다.
이렇게나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할아버지에게 정작 나는 표현을 많이 했었나. 추워지는 계절마다 노심초사 손녀딸 옆에서 간호해주셨던 생각을 할 때면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