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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빛 Oct 19. 2022

떡반과 파마머리 일진


‘일진’이라는 단어가 세월이 흐르면서 꽤 구체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역별로, 나이별로 학교별로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학교생활을 했을 때의 대부분의 소위 ‘일진’ 애들은 모두가 폭력적이진 않았다. (당연히 일부는 정말 술, 담배, 폭력과 연계된 진짜들도 있었지만)


어른이 되서 다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정해주는 복장, 머리길이, 일련의 규칙들을 지키지 않으면 그시절엔 몽땅 모아서 ‘일진’이라고 낙인찍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흰색 목이 올라오는 짧은 양말을 신어야 하는데 굳이 캐릭터 그려진 발목양말을 신는다던가, 넥타이 없이 반팔티를 입는다던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이유로 불량한 학생들은 친구들 앞에서 맞기도 정말 많이 맞았다.

(웃으면서 오늘도 너냐며 장구채로 60대 넘게 발바닥을 때리던 그 선생님은 사디스트같았다)


나는 이런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학생이었다. 사상은 반항적이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고, 어쨌든 주어진 공부는 꾸역꾸역 해내는 모범생.


이런 내가 나름의 위기를 느낀건 고등학생 2학년 때 일이다. 타의반 자의 반의 반으로 또 반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예상과는 다르게 부반장으로 파마머리의 일진친구가 선발되었다. (아직 두발규제가 존재했던 때였다)


아무런 준비도 안한 나와 달리 열심히 연습한 듯한 꼬깃한 종이 대본까지 읽어가면서.


“이왕 되었으니까, 열심히 해볼게~!”하고 콧소리 가득한 아양 넘치는 목소리로 기쁘게 얘기하는 우리의 부반장.


우리는 정말 안맞았다.




우리반은 안그래도 주의요망의 반이었다.


공부를 포기한 친구들이 1/3

공부를 놓지 않았지만 하기 싫은 친구들이 1/3

진짜 최상위권 일부와 공부하고 싶은 친구들 1/3

이 친구들이 모두 섞인 선생님들도 한탄하는

혼란의 카오스 반이었다.


공부를 포기한 친구들은 야간학습때 집에 가니 그렇다 쳐도, 공부하고 싶은 친구들에게는 뒤에서 신나게 떠들면 공부가 될리가 없다. 당연히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고, 공부도 당연히 좋을리 없지만,


“얘들아, 우리 조용히 하자”

이런 소리를 계속 해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반장도 모범생 느낌의 친구와 했으니 번갈아가며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해와서 괜찮았지만, 나의 파마머리 친구는 그럴리 없다.


”어휴 반장, 알았어~“하며 흘겨보고 깔깔 웃는다.

어떨 때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었는지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갑자기 조용해지며 눈빛교환을 하고 큭큭 웃기도 한다. 화내봤자 뭘 하겠나 싶어서 그대로 뒀다.


한동안은 이런 상태였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외진데에다 산 아래에 있다. 땡땡이를 쳐도 정성스럽게 20분은 걸어야 한다.


다행히 매점은 커서 상관은 없지만,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우니 강제 면학분위기가 조성된다. 나는 매점 음식에 만족했지만, 부반장은 이때 특정 떡볶이에 미쳐있었다.


여교생=떡볶이 공식은 언제나 성립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학교는 하도 외져서 떡볶이를 배달해 먹으려면 20명은 모집해야 했다.


그날은 급식이 맛없는 메뉴라 성공할 법도 하건만. 부반장은 2교시 쉬는 시간부터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종이를 손에 들고 반을 돌아다니면서 떡볶이 먹을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돌고 돌다가 결국 엎드려 자고 있는 나한테 왔다.


“야, 반장”

“왜”

“야...너 떡반 안 먹을래? 진짜 맛있거든? 안먹으면 니 손해야. 싫음 말고.“


다른애들한테는 이거 다 채워야 온다고 간곡하게 몇번을 말하더니. 나한테는 저렇게 말하는게 웃기기도 하고, 그 떡볶이가 그렇게 맛있나 싶어서 한번 먹어볼게 하니까 신나서 “아싸!”하고 간다.


떡반이라고 부르는 떡볶이는 라면스프 맛이 나면서 달달한 국물 떡볶이다. 얇은 밀떡 몇개와 달걀 한개가 들어있는데, 포크로 달걀 노른자를 떡볶이 국물에 으깨서 먹으면 고소하고 맛있다. 특별하기 보다는 자극적인 맛이었다. 그래도,


‘급식보다는 백만배 맛있네’라고 생각할 때

“야, 맛있지?” 하고 민망한듯이 부반장이 책상을 콩 치고 간다. 진짜 웃긴애다.




떡반이후로 조금 친해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사건건 의견이 갈렸다. 예전처럼 날이 서있는 그런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승의 날 선물이니, 교재비를 들고 누가 날랐니 하는 몇몇 사건들에는 서로 생각하는 게 달라 투닥거렸다.


그러다 세상에, 짝꿍이 되었다.

선생님들도 그렇게 싸우더니 짝꿍이 되었냐면서 놀리셔서 서로 언짢아했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것은 짝꿍이 되고 난 뒤 첫 모의고사날이었다. 모의고사 날이면 다 끝나고 서로 바꿔서 꼭 채점을 했다. (내가 채점해도 될텐데. 프라이버시도 없나)


나는 수학에 완전 소질이 없었고, 정말 세상 누구보다 부반장한테는 들키기 싫었는데. 채점하면서 이놈의 파마머리가 미친듯이 웃는다.


“야, 너 뭐야!!!너 나랑 동점인데?”

이번엔 어렵긴 했지만 그럴리가 있나.. 했는데.

진짜다. 19점. 나는 게다가 열심히 풀었는데.

“아 뭐야~나는 찍고 잤는데ㅋㅋㅋ너 풀었잖아! 내가 다 봤거든? 나랑 어떻게 똑같이 19점이야?”


수치심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 아 정말 싫다. 너도 나와 같은 과구나? 하는 저 빙글빙글 웃는 눈빛. 너무 어처구니 없고 할말은 없어서 입을 닫고 있었는데 그게 웃긴지 부반장은 길게 이어진 눈이 둥글게 휘도록 깔깔 웃는다.


그래도 나의 흑역사, 수치심과는 달리 우리의 파마머리 일진 부반장은 그 뒤로 나에게 꽤 친근감이 들었나 보다. 그다음 떡반 먹을 때는 나한테 제일 먼저,

“야 000, 떡반 안먹을래?” 라고 물어봐준다.

여전히 성까지 붙여서 정나미 없이 틱틱거리지만

1년이 끝나갈 때쯤에서야 우리는 반장, 부반장 대신 이름을 서로 부르게 되었다.


2학년 말때쯤에는 공부를 포기하고 기술을 선택했던 떡반을 좋아한 나의 파마머리 일진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가끔 궁금하다. 떡반은 아직도 그 가게에서 팔던데, 여전히 좋아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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