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빛 Oct 04. 2022

짜파게티와 멧돼지


내 친구 J양은 모범생이었다.

나같은 모범생 탈을 쓴 장난꾸러기와는 다르게, 정말 조용하게 숨쉬듯이 공부하는 친구였다.


성적 역시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초상위권은 아니지만 늘 상위권에는 들었고, 우직하게 수능만 공부하는 정시파 친구였다.


네모난 뿔테 안경을 쓰고 말을 걸어봐도 조용하게 툭툭 대답만 할뿐 이어질 만한 거리가 없어서 정말 얘는 진짜 모범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 이 친구가 진짜 놀면 어떤 모습일까?’도 조금은 궁금했다.


결이 달라서 친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우리 둘은 여고생 답게 음식으로 친해졌다. 6교시가 끝나고 청소시간에 빠르게 매점으로 향하면 간식먹을 시간이 잠깐 빠듯하게 생긴다. 하지만 시간은 20분. 빠르게 정해서 급하게 먹어야 한다.


그날따라 늘 먹던 카카오 몽쉘도, 소세지 빵도 아무것도 안땡기던 나는 카운터에서 잠깐 고민하고 있었는데 J양이 옆에 오더니 불쑥,


“야, 혼자 먹긴 좀 많은데 짜파게티 먹을래? 내가 살게” 라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실 짜파게티를 컵라면으로 먹은 건 이때가 처음이라 능숙하게 물을 버리고 짜파게티를 비비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리고 한입 먹으니 아, 봉지라면과는 또다른 자극적인 맛에 면발이 훨씬 맛있다!


자기는 짜장이 뭉쳐있는 부분이 최고 맛있다고 슬쩍 웃으면서 얘기해주는 J양과 그날부로 가까워졌다.


매점에 의외로 자주 가지 않는 J양은 혼자 먹기 힘든 짜파게티 컵라면을 먹을때만 나한테 같이 가지 않으려냐고 물어봤고, 우리는 농담을 나누며 꽤 친해졌다. (혼자 먹기 힘든 이유는 먹고 두시간 후에 또 저녁을 먹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은 늘 배가 고프다)


하지만 20분은 짧은 시간이라 어느날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가기에 늦어버렸다.


청소시간 이후 2시간은 보충시간이다. 열학급 정도 되는 학생들을 학급별로 상중하 레벨로 나눠 각각 다른 교실로 이동하기 때문에 땡땡이 쳐도 눈에 안띄는 시간. 사실 나는 보충 때 그 틈을 타 도망을 많이 갔었지만 J양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땡땡이를 권했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시계를 다시 흘끗 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이미 시간이 늦어서 교문을 통과하기엔 글렀고, 뒷산이나 가자고 나는 얘기했다.

그렇다. 얕은 산행도 땡땡이면 신이 나는 것이 고등학생이다. 나는 J양의 눈빛이 그렇게 신이나서 반짝거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들킬까봐 미친듯이 뛰어올라가는데 웃음이 났다.

다른애들이 오늘도 똑같이 공부할때 땡땡이를 치는 것도 묘하게 우월감이 느껴졌고, 공부만 하는 J양에게 드디어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는 것 같아 신났다.



그런데 그날의 뒷산은 이상했다.


정말 여러번 올라와서 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심지어 30분을 걸으면 근처 대학교가 나오는 지름길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걸어 올라가도 내가 좋아하는 무덤가 옆 탁트인 얕은 평지가 있는 스팟이 나오질 않는다.


“야...우리 잘 가고 있는거 맞아...? 갑자기 어두워지는 거 같기도 하고...”

J양은 약간 풀이 죽어 얘기했다.


득의 양양했던 나도 “왜이러지..진짜 내가 이 길 다 알고 있단 말이야”라고 대답하며 당황했다.

그런데 J양이 갑자기 하는 말이,

“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아까 애들이...뒷산에 멧돼지 있으니까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그랬대”라고 한다.


산속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니 진짜 왠만한 벌레와 동물은 무섭지 않지만, 멧돼지면 덩치도 크고 진짜 치여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아 갑자기 무서워진다. 그런데 더 무서운건 시간이다. 핸드폰을 보니 정말 이제 내려가지 않으면 들킬 수도 있다.


“야!! 그걸 왜 갑자기 얘기하고 난리야!”

“아 몰라..으악!!!!! 야 저기서 소리난 거 아니야?”


J양은 그때부터 패닉에 휩싸여서 어디에서 소리가 들렸다 하면 미친듯이 소리지르면서 뛰기 시작했고, 나는 길을 잃을까봐 무서워서 그런 J양을 뒤쫒아 뛰기 시작했다. 꽤 추웠던 늦가을이었는데 더워서 중간에 마이를 벗어야 할만큼 나무를 헤치면서 달렸다.


그렇게 계속 뛰어서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을 때 어랍쇼? 급식실 뒷편에 도착했다. 헤맸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내쉰 후에 서로 마주보며 그래도 멧돼지를 피해서 잘 어떻게 길을 찾았다고 낄낄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급식 대열에 합류했다. 그랬는데, 우리를 본 같은 반 친구들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야!!!!!야 너네 어디갔었어!!!!”

“어? 야! 조용히 해, 우리 땡땡이 쳤었단 말이야”

“하씨, 야 너넨 꼭 ..땡땡이를 쳐도 이런날 치냐”

“왜? 우리 들켰어?”

“야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것들아..”


친구들의 말인 즉슨, 멧돼지보다 더 무서운 게 뒷산에 있다고 선생님들이 주의를 줬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 근방에서 성폭행범을 잡으려고 했는데, 놓쳐서 도망갔다는 거야..그런데 이 뒷산에 있거나 통해서 갈 수도 있으니까 선생님들이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다고..


친구들은 우리가 땡땡이 친 사실을 알았지만 얘기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고 초조하게 있다가 보충시간이 나타나도 안나타나면 정말 선생님께 얘기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우리 둘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소리지르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녔는데.


그날 저녁은 말많은 여고생 둘이 아무말 없이 밥먹고 조용히 공부하다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때 우리 미쳤었던 것 같다, 고 얘기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이전 04화 학습지와 오므라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