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밥 밥냄새

by 겨울빛


향은 기억을 담는다.

그리고 어떤 냄새는 맡자마자 코보다 입매 끝이 반응하고, 더없이 사람을 이완시키는 냄새도 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다 못해 사르르 녹아버리는 냄새. 나에게 그 냄새는 '밥 냄새'다.


똑같은 탄수화물이지만 빵 냄새와 밥 냄새는 좀 다르다. 빵 냄새는 사실상 냄새의 8할 이상이 버터향에 가까운 느낌이다. 고소하고 기름져서 사람을 설레게 하는 유혹적인 냄새는 아주 강렬해서 몇 미터 밖에서도 사람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그에 비해 밥 냄새는 좀 더 달큰하고 은은하다. 연기로 치면 빵 냄새는 화산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증기 같다면 밥냄새는 모닥불 연기같다. 다만 밥 냄새는 분명 향인데 코가 반응하는게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 사람을 나른해지게 하고 아무일도 없었는데 괜스레 마음이 차분해진다. 맡으면 괜히 더 숨을 크게 들이 쉬고 하아-하면서 심호흡하게 하는 냄새.


또 밥 냄새는 어디에다가 밥을 하는지에 따라 미묘하게 그 향이 달라지고, 어떤 쌀으로 밥을 짓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글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냄비에다가 밥을 하면 냄새 그 자체에도 무게가 생기는 느낌이다. 좀 더 곡류향이 더 응축되어 있고 느리게 향이 퍼진다. 전기밥솥에 밥을 하면 증기에서 누룽지향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지만 막상 먹을 때가 되면 찰나에 그 향이 흩어진다. 냄비밥 자체에도 좀 더 향이 머무르는 것은 기분 탓일까.


냄비가 주물냄비여서 그런 걸까. 밥 냄새를 맡으면 나는 어렴풋이 아홉살 때 친할아버지 장례식이 떠오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짜 집 앞 작은 마당에서 치뤄지는 전통적인 장례식이었다. 아빠의 푸석한 얼굴과 붉게 물든 눈, 그 얼굴의 까슬함을 닮은 누런 상복. 한쪽에서는 곡하는 소리가 나고, 작은 마당에서는 천막 아래 음식을 나르는 소리와 조문객들이 왁자지껄하게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지금은 녹슬어도저히 여기에 밥을 지었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가마솥으로 하얀 밥을지었는데, 고모가 묵직한 뚜껑을 들어올리자 밥 냄새가 그 왁자지껄함을 지긋이 눌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일순 모두가 가마솥을 쳐다봤던 그 순간을.


밥 냄새는 참 그립고, 까슬하고도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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