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애정과 증오
5월 15일 월요일
일어나자마자 모자만 눌러쓰고 달렸다. 잠은 물론 설첬다. 마음이 불안했다. 천천히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숨이 금세 찼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컥컥 대며 숨을 고르고 있다가 지금 아버지도 이렇게 숨을 쉬기 힘들겠다란 생각을 하니 땀과 눈물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침 해가 뜨거웠다.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올지도 모르므로.
집에 들어와 씻고 나니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폐에 물이 차서 튜브로 물을 빼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기도삽관이 지금 3번째인데 환자에게 여러 번 반복하는 게 좋지 않아 호흡기내과랑 상의 중입니다. CT상으론 특별히 나빠지는 건 없고 염증은 아주 조금씩 개선되고 있습니다. 가래가 계속 생겨서 환자가 숨쉬기가 힘들긴 해요. 지금은 환자가 혼자 가래를 뱉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 가래를 수시로 빼내야 합니다. 어쨌든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기도삽관하면 환자에게 마취제를 놓는다고 하셨잖아요. 계속 그렇게 마취제를 놓으면 환자에게 영향이 없을까요?"
"마취제는 환자가 힘들어하기 때문에 쓰는 거고. 정말 소량만 쓰기 때문에 추후 회복되었을 때 환자 의식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은 일단 전반적으로 다 좋아지셔야 합니다. "
의사의 말은 지금 당장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회복 후에 일까지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100%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스치면 일부러 시끄러운 음악을 듣는다거나 해서 우울한 생각을 덮어버렸다.
5월 17일 수요일
오후가 되기 전, 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도삽관했던 호흡기는 다시 떼었고요. 폐렴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제 뇌 CT를 다시 찍었는데 피가 많이 녹았더라고요. 뇌에 부종이 여러 군데 있어서 회복 후에도 뇌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그게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는 힘들고요."
"호흡기를 뗐으면 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이름정도 말씀하시고요. 알아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예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자가호흡이 많이 좋아져서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폐에 차 있던 물도 많이 빠졌고요. 전반적으로 호전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일반실을 올리는 건 조심스러워서 좀 더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5월 20일 토요일
바빠야 하는 날인데 바쁘지 않았다. 이상하게 아버지 사고 이후 손님이 예전보다 줄었다. 아버지는 가게를 하는 걸 반대했었다.
"네가 지금 왜 그 일을 하고 있니? 더 큰 일을 하고, 한창 일을 할 나이인데. 그 작은 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술에 취한 아버지가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끝까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헀다. 자식의 입장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가게를 시작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단은 부모님의 경제적인 케어를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이른 은퇴 후 부모님의 생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엄마에게 있었다. 엄마는 식당 일을 오래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은퇴와 함께 작은 식당을 시작했다. 백반전문 식당, 막썰이 횟집, 돼지고기구이집을 거치며 식당을 조금씩 키워갔다. 아버지는 은퇴 후,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식당 일도 돕지 않았다. 자존심이 센 아버지에게 식당 일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아버지가 무엇을 해보려고 시도 조차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금도 워낙 없었는데 그나마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아파트를 사는 데 모두 써버렸다. 서울 끝자락의 있는 창동의 신축 아파트를 아버지는 은퇴 후의 안식처로 생각했다. 집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은 가족을 모두 힘들게 만들었다. 나와 동생은 알바를 해서 대출금을 보태야 했다.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파트를 팔 생각이 없었다. 가족 모두가 돈을 버는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아파트 대출금을 갚으며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모두가 불행했다.
그리고 불행은 이어져 아버지가 담도암에 걸렸다. 4기였다. 고모들은 아버지의 수술을 말렸다. 괜히 수술했다가 더 위험해지니 말년을 편안하게 해 드리다가 보내드리자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주워들은 말로 조언을 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의사가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수술을 하겠다는 것.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엄마는 하던 가게를 모두 정리하고 병원비로 썼다. 그리고 1년을 넘게 아버지의 건강회복에 집중했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건강회복을 하자 엄마는 다시 일을 찾았다. 식당을 다시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병원비로 돈을 다 쓴 상태였고 엄마는 다시 남의 식당에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는 다시 식당을 오픈하지 못했다. 작은 식당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엄마는 예전 같지 않았다. 자신감도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잘 몰랐다. 엄마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를 현실적으로 걱정했던 건 부끄럽게도 내가 아니고 아내였다. 시어머니의 상황을 좀 더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가 10년 후 어디든 떠날 수 있으려면 우선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해. 이제는 우리가 나서서 부모님의 생활도 설계해 드려야 할 때가 온 거야. 물론 우리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생활이 좋아서 부모님을 케어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거겠지. 하지만 지금 그럴 수 없으니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야."
막연하게 식당을 해보고 싶었던 나에게 아내는 엄마와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나는 아내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게 나의 굴레였으므로.
가게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엄마도 이제 그만 쉬어야 한다고 했다. 경제적인 대책도 없으면서 너무 쉬운 말만 하는 아버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게를 시작했을 땐 가게가 너무 작다고 이런 규모로 벌어야 얼마나 벌겠냐는 얘기를 했다. 나는 아버지가 가게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 실제로 가게를 운영하는 4년 동안 아버지는 3번 가게에 들렀다.
5월 21일 일요일
일요일에 가게를 나와 청소를 했다. 놀기도 뭐 하고 그냥 뭐라고 하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가게 정리를 하고 본가로 갔다. 혼자 있는 엄마가 걱정되기도 하고 내일 병원에서 오는 전화를 같이 받아보고 싶기도 했다. 본가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온다고 하면 오는 시간에 맞춰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던 아버지였다.
덩그러니
엄마는 소파에 혼자 앉아있었다. 집이 조금 어수선했다. 집을 좀 치우고 있지 그랬냐고 이제 정신을 좀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끝내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