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he will have to go
6월 19일 월요일
담당의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영양공급을 위해 하고 있는 콧줄 때문에 코가 많이 헐어서 반대편으로 콧줄을 바꿔 달아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의사는 콧줄을 계속하는 것은 호흡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위에 직접 튜브를 삽입하는 뱃줄도 미리 고려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맛있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맛있는 걸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배가 불러서 입맛이 없다가도 아버지가 먹는 걸 보면 같이 먹고 싶을 정도.... 담도암 말기를 이겨낸 것도 잘 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그만큼 잘 챙겨주기도 했지만 큰 병을 앓은 사람답지 않게 아버지는 뭐든 잘 먹었다. 유튜브로 어르신 먹방을 했거나, 홈쇼핑 먹방 모델로 진출했어도 분명 사람들이 좋아했을 거다.
그런 아버지가 튜브를 통해 식사를 대신하고 있으니 우리 가족은 더 안타까웠다. 사고가 나기 전 몇 주 전부터 자기가 살 테니 장어 먹으러 가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약속을 미뤘던 게 후회됐다.
6월 21일 수요일
엄마 혼자 처음으로 아버지의 병원을 갔다. 병원이 서울이었으면 좀 더 편히 갈 수 있었겠지만 안동이라 아무래도 엄마 혼자 가는 게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를 안동에서 치료하겠다는 건 가족과 상의하긴 했지만 사실 나의 결정이었다.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식구들이 안동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 역시 오로지 아버지만 생각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크게 마음 쓰진 않았다. 안동복주병원이 아버지를 잘 케어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치료 기간이 끝나면 다시 가까운 곳으로 모실 것이기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6개월 정도 식구들이 병원에 가느라 조금 고생하긴 하겠지만 아버지만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나는 내 결정이 옳았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짧은 면회를 마치고 엄마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전화를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엄마는 조금씩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
"눈도 깜빡이고 입도 벙긋벙긋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자꾸 말을 하려고 하긴 해."
최소 6개월은 천천히 지켜봐야 한다고 엄마에게 최대한 건조하게 얘기했다. 나는 아버지가 중증환자라는 것을 엄마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터미널에서 밥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혼났다고 했다. 식당을 하는 사람이 너무 기본이 안 돼있다며 그렇게 만드는 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엄마는 식당을 오래 했어서 웬만하면 밥을 먹고 비난을 하지 않는다. 밥을 먹은 후에는 상을 치우기 쉽게 매번 정리를 하고 나와 우리가 '치우는 것도 음식 가격에 다 포함돼 있는 거라고, 그만하라고' 얘기할 정도다.
엄마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엄마가 맛집에서 먹었다고 해도 그게 맛있었을까? 뭔가 비난할 것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작은 것도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는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껏 엄마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엄마는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후 엄마가 변했다. 엄마는 불안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별 것도 아닌 걸 물어봤다.
"그래도 기차역 복잡한데, 잘 타고 다녀왔네."
"그럼. 안 해봐서 그렇지. 그것도 못 할까 봐?"
혼자 기차를 타고 면회를 다녀온 엄마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6.24 토요일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노란 점퍼가 예뻤다.
꿈에 본 장면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적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언젠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6.25 일요일
동생이 아침 일찍 아버지 면회를 갔다. 영상통화를 했는데 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건 병원에 간 후로 처음 본다. 어떻게 앉아 있냐고 물어보니, 병원에서 앉는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혼자 앉지는 못하지만 곧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간호사가 얘기했다고 한다.
마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왼손에 비해 오른손이 많이 부어 있었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내가 계속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더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거들어 번쩍 들어 보였다.
바로 옆에 있던 동생도, 휴대폰 화면으로 보고 있던 나와 아내도 깜짝 놀랐다. '나는 괜찮다‘ 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면회를 마치고 동생이 전화를 했다.
"형. 아버지 많이 괜찮아졌어.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더라. 나 가려고 하니까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내 귀에 대고 '애썼다'라고 얘기하는 거 있지?"
"정말? 그렇게 얘기했다고?"
"응. 내가 분명히 들었어."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니 가슴이 뛰었다.
7.3 월요일
휴일이다. 아버지 면회를 갔다. 주말에는 면회실에서 따로 면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마스크를 벗고 얘기할 수 있지만 주중에는 면회실이 허락되지 않아 사람들이 다니는 복도에서 면회를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마스크는 벗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끔뻑거리는 눈만 보고 얘기했는데 나를 알아보는지 알 수 없었다. 별 다른 얘기도 없이 마스크를 쓴 아버지의 눈을 계속 보고 있었다. 초점이 또렷하지 않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바심이 났다. 내 손을 꼭 잡아 줬으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다른 식구들에게는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래 두고 봐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정작 마음이 급한 건 나였다. 그렇게 말도 없이 아버지와 눈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눈 한번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술에 취해 집에 오면 혼자 흥얼거리며 들었던 그 노래. 우리 가족이 지겹게 들어 이제는 익숙해져 어느덧 추억이 된 노래.
jim reeves 특유의 저음이 휴대폰에서 감미롭게 흐르기 시작했다.
Put your sweet lips a little closer to the phone~~~~~
아버지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목소리가 들리자 가만히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했다. 분명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가래가 많이 끓었다. 뱉을 힘이 없어 자꾸 삼켰다. 그러니 말은 더 안 나왔다. 그래도 자꾸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이며 말을 하려 했다.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힘들어”
눈물이 쏟아지는 걸 꾹 참고 아버지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아 힘들어 힘들어 당연히 힘들지. 그래도 대단해. 다 이겨냈어. 그 힘든 걸 다 이겨냈어. 대단해. 정말. “
서울행 기차에서 나는 내내 울었다. 힘들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