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2일 차
포르토마린~팔라스데레이(≈25.39km)
어찌 오늘은 5시 반에 눈이 딱 떠졌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짐을 와르르 챙겨 공용공간으로 나왔다. 적절한 기상 시간, 다만 몸은 천근만근이다. 역시 빨래가 덜 말랐다. 어쩔 수 없이 배낭에 널어 우선은 내버려 둔다. 길을 다 걸은 다음 다시 빨기로 했다. 주제에 쉰내는 절대로 못 참겠다.
6시 40분, 숙소를 나섰다. 매번 그렇지만 뭐라도 놓고 오진 않았을까 괜히 찝찝했다. (그동안 한 벌의 티셔츠와 한 장의 수건을 그렇게 잃어버렸다.) 공기가 쌀쌀하긴 했다. 그렇다고 춥거나 그렇진 않았다. 입김이야 물론 났다. 폴폴폴, 상쾌할 정도였다. 별도 달도 다 떠있다. 검은 강이 분명한 제 존재감을 뽐내며 어둠 위로 흘렀고, 밤인 새벽은 평화토록 고요했다.
이틀 전 스페인 남동부에 난 폭우 소식을 들었다. 홍수로 인한 사망자가 상상 이상이었다. 발렌시아 지역의 피해가 특히 컸다고 한다. 정부의 뒤늦은 대처는 무능한 윤석열 정권의 한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안타까웠다. 이 나라를 걷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선포된 사흘간의 애도 기간에 맞춰 발걸음만큼은 가볍지 않게 두기로 했다. 겨우 그 정도의 태도인들 잊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한다.
어쩌면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직접 맞닥뜨렸을지도 모를 재난이다. 슬픔도 슬픔이지만, 생각은 돌고 돌아 오늘도 무사히 걷고 있는 나 자신에게로 결국 되돌아오고야 만다. 그 무사함이 얼마나 우연에 가까운 건지 알기에,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잡미묘했다. 평화롭기만 한 이 새벽의 분위기가 그런 감정을 부추기듯 헝클어댔다.
한동안 강을 따라 걸었다. 물안개가 짙어 시야마저 흐렸다. 인도 없는 차도엔 아직 차가 한대도 지나지 않는다. 곧 도로에서 빠져 외진 오르막을 오른다. 음산한 마을을 지나 숲길을 걷는다. 표지가 보이지 않아 GPS를 자주 확인해야 했다. 듬성듬성 선 낡은 가로등이 오히려 더 무섭다. 헉헉 숨이 차올랐고, 그 소리에 덩달아 섬뜩함은 배가 됐다.
수풀 사이 빛나는 고양이의 눈동자는 미동이 없었다. 웬 두꺼비 한 마리는 벽을 향해 머리를 반복적으로 부딪혔다. 가까이 들려온 소 울음소리가 한껏 낮았다. 까악까악 까마귀가 무심히 날아오르며 하늘에 검은 얼룩을 만들어댔다. 댓바람부터 만난 오르막이라 버거웠다. 버려진 공장지대를 지나면서부터 겨우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오자 확실히 덜 무서웠다. 복잡했던 감정도 그제야 살며시 한편으로 미뤄둘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아 다행이었다. 특히 여기 갈라시아 지방의 기후는 변덕이 심하고 비가 많다고 했는데, 되려 화창한 날이 잦았다. 남동부의 기록적 폭우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곳의 날이 맑아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순간 마음이 다시 딱딱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의 가치는 내 걸음의 의미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태양은 이미 준비가 다 됐다. 서서히 솟아오는 빛깔이 있었다. 은근한 오르막이 계속 돼 한숨이 절로 났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건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변한다. 탁 트이자 모든 것엔 따스함이 닿았다. 대지는 색채를 모두 품는다. 아, 사랑해 마지않는 아침빛의 길이다. 변화하며 풍기는 이 뉘앙스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며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모든 것을 잠시나마 잊는다.
8시 20분, Gonzar 마을로 들어설 때는 괴로울 정도로 진한 분뇨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오래되어 썩고 썩은 그런 고약한 냄새였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실망했다. 하긴 문 연 bar가 있더라도 도무지 이 냄새 아래 맛있게 먹을 재간도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덩그러니 문을 연 알베르게 겸 bar가 하나 있었다. 다행히 여기까진 역한 악취가 쫓아오지 못했다. 초코레또와 아메리카노를 시켜 쉬어 간다. 야외에 앉아 콧속을 정화시켰다. 물론 뱃속도 적당히 채웠다.
이제 정말 등산화의 수명이 다 되기라도 한 건지 조금씩 뒤꿈치가 아파왔다. 바닥의 쿠션감이 싹 다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와 원래 어땠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게 함께 오래 걷긴 했다.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의 절벽에서 순례길을 마친 등산화를 던져 버린다고도 했다. 버려진 등산화들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기둥이 거기 세워져 있단다. 나도 버려야 할까. 하지만 기념으로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미련일지, 애정일지. 딱히 쓸모가 없어진들 쉬이 이별하진 못할 것 같다.
언덕을 오른다. 마을도 지나고 고가도 넘었다. 숲이 굴곡지며 펼쳐진다. 하얀색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덩그러니 있다.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 초록이다. 고사리는 갈색이다. 가지와 이파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빛깔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언제고 이토록 '아름답다' 부른 적이 많았던가,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순간들이 새삼 다디달게 느껴졌다.
10시, Ventas de Narón 마을을 지난다. '부엔까미노', 아빠의 손을 잡고 나타난 동네 꼬마 아이가 옹알옹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라시아스', 배에 손을 얹어 정중히 화답을 했다. 낯선 얼굴에도 모두가 함께 웃었다. 집 앞을 지나는 순례자를 매일 같이 바라보며 자랄 이 아이의 삶이 궁금했다. 언젠가 순례길을 떠나기도 할까. 귓가에 그 아이의 음성이 맴돌았다. 음률이 선명하도록 오르고 내렸다.
10시 45분, Ligonde 마을이다. 이제 슬슬 쉴 타이밍이었다. 동네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 계셨다. 고양이와 강아지도 유난히 많았다. 그런데도 뭔가 텅 비어있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다가온 프리허그가 있었다. 도네이션 카페였다.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선뜻 말을 건네고 따뜻한 차와 쿠키를 내어주는 곳이었다. 사는 곳을 표시해 달라는 요청에 세계 지도 위 제주도에 핀셋을 첫 타자로 꽂았다. 블랙커피 한 잔을 마셨다. 도네이션으로 1.5유로를 냈다.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흙길과 아스팔트길을 번갈아 걷는다. 비슷한 길의 연속이었다. 12시 즈음의 Lestedo 마을에서 ‘비싼’ 깔리무초 한 잔으로 또 한 번 쉬어간다.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옆에 찰싹 붙어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렸다. 톡톡톡 턱을 쓰다듬으니 말간 눈을 다정히 내어줘 그만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말았다. Igrexa de Santiago de Lestedo 성당에서 정겨운 세요(Sello)도 찍었다. 도로 바로 옆길이긴 해도 울창한 숲의 느낌이라 걷기가 나쁘지 않았다. 낙엽 밟는 분위기가 또 나름 감성을 돋운다.
12시 50분, 마지막 마을 O Rosario를 통과하며 숲으로 다시 든다. 공원인 듯 아닌 듯 길이 얼마간 이어졌다. 안내센터를 지났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마을로 은근슬쩍 들어선다. 숙소는 바로 초입에 있었다. 1시 15분 도착해 일등으로 체크인을 했다. 침대를 정한 뒤 곧장 씻었다. 빨래거리가 많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야외 건조장에 죄다 널고 나니 실없이 마음이 후련했다. 뒤늦은 기지개를 쫙 켜며 오후의 휴식을 개운하게 맞이했다.
어느 bar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깔리무초 한 잔을 하고 있자니 '철의 십자가 삼인방'이 하나둘 오는 게 보였다.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각자의 숙소에 짐을 풀고 나오길 기다려 미리 정해둔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셋이 모이니 식사가 아주 든든해진다. 거하게 나눠 먹고선 또 각자의 시간으로 쿨하게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이런저런 혼자만의 정비 시간을 보냈다.
해질녘 바로 앞 공터로 슬그머니 나가봤다. 뜻하지도 않게 또렷이 지는 해를 거기서 보게 됐다. 풍경을 놓칠세라 얼른 자판기서 캔맥주를 뽑아왔다. 아무렇게나 계단에 앉아 홀짝홀짝 시간을 감상했다. 저만치 하루의 태양이 천천히 저물어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 문득 일었다. 순례길의 여정이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음을 하루씩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산티아고성당에 도착하는 순간을 상상하다, 차라리 그때 펑펑 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그러리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괜히 감상적이 돼본다.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려 끝자락의 빛에 흘려보냈다. 웃음을 지었고, 이상하게도 조금은 슬펐다.
늦저녁 삼인방이 부른다. 성당으로 나갔더니 오렌지와 비타민을 주신다.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 어쩐지 반가웠다. 피곤해하는 한 분은 먼저 들어가시고, 나머지 둘은 아쉬움에 깔리무초 한 잔까지 나눈 후 헤어졌다. 벌써 밤이 내렸다. 사라진 해만 가슴에 붉게 남았다.
돌아와 주섬주섬 내일을 준비한다. 빨래가 바삭 말라 그것만은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28km로 모처럼의 먼 거리다. 아주 긴긴 날이 예정되어 있다. 잘 걸어갈 수 있을는지, 긴장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일어나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늘 그랬듯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2024.10.3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2일 차(누적거리 705.66km)
오늘 하루 43,715보(27.7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