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과 벌써 사이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0일 차

by 달여리
트리아카스텔라~사리아(≈24.24km)


다섯 시 기상, 여섯 시 십오 분 출발. 미끄러지듯 침대를 빠져나와 후다닥 준비를 마쳤다. 아침은 따로 먹지 않았다. 대신 스트레칭을 정성껏 했다. 물을 시원하게 마신 뒤 몸을 비웠다. 저녁에 비해 새벽은 그리 춥지 않았다. 컴컴한 하늘엔 별과 눈썹달이 제각각 걸려있었다. 입에선 입김이 나왔다. 찍찍찍, 어디선가 어울리지도 않는 도마뱀 소리가 들려왔다.

<밤인 새벽,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오늘은 말로만 듣던 사리아(Sarria)로 향하는 날이다. 순례길 공식 완주 증서를 받기 위한 최소 도보 거리의 기준인 100km를 충족시키는 마지막 거점이라는 점에서 사리아는 특별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부터 114km 정도 떨어져 있다. 대략 5일 정도만 걸으면 완주 증서를 받을 수 있기에, 여기서부터 새로운 순례자들이 대거 합류하게 된다. 사리아에 도착한다는 것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긴 여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짧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두 가지 갈래길이 있었다. 짧고 가파른 산실(San Xil) 방향과 완만하나 긴 사모스(Samos) 방향이었다. 산실보다 7km 정도가 길지만 운치가 더 좋다는 사모스 방향으로 향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가파른 오르막이 싫었다.

<안개와 숲, 마을의 길>

도로 옆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선 강물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중간중간 데크도 있었고, 흙길도 있었다. 한 번씩 랜턴을 끄고 기억에 담듯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안개가 한껏 몰려와 어둠마저 흐릿했다. 7시 10분, 첫 마을 San Cristovo do Real을 아무렇게나 그대로 통과했다. 흰 벽의 성당과 스산한 공동묘지, 약간 무서운 느낌이었다. 이내 어두운 숲길 아래를 거닌다. 사소한 소리에도 소스라치듯 뒤돌아보길 반복했다. 자꾸만 으스스한 생각이 떠올라 걸음이 더더더 빨라져 갔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들판의 소들은 말이 없었다. 무서움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적막함이 채워갔다. 느낌상 bar는 한참 후에나 나올 것 같았다. 어제 산 사과를 아작이며 걸었다. 사모스 방향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꽤 있다. 이 언덕의 마을에서 저 언덕 위 마을로 건너뛰듯 숲속을 반복해 통과했다.

<언덕의 마을들을 넘으며>

7시 30분, Renche 마을을 통과한다. 역시나 묘지인 성당을 지난다. 랜턴을 껐다. 보일락 말락 그래도 걸을만해졌다. 언덕을 내리고 또 올라 다음 마을 Lastres였다. 숲속에 이런 작은 마을들이 있다니, 방심하다가 요정이라도 마주칠 기세다. 안개가 분위기를 더했다. 완벽한 BGM, 새소리가 끊임없었다. 길보다 귀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다.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자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쓸데없이 끼어드는 잡념이 없었다. 걸음도 제 속도를 찾았다. 싱그러운 숨을 크게 들였다 내쉬었다.


마을을 연달아 통과했다. 오르막이 쉬지 않고 반복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얀빛의 마을 Freituxe와 San Martiño do Real을 지났다. 계속 흘러대는 콧물을 흥! 하고 풀었더니 부끄러울 만큼 엄청난 양의 콧물이 나와 놀랐다. 밤톨이 밟히면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사부작사부작, 길은 걷는 만큼 거짓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안개의 길>

8시 반, 스리슬쩍 사모스(Samos)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가는 돌담길이 안개와 버무려지며 비밀스러운 장소가 된다. 동화 속 터널을 통과하듯 걸음을 살푼살푼 밟았다. 혹여나 메두사라도 있을까, 뒤로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마을은 의외로 평범했다. 길은 높은 곳에서 이래로 통했다. 다행히 그 끝자락에 문 연 bar가 드디어 있었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두말하면 잔소리, 역시나 초코레또와 카페콘레체다.


9시 10분, 다시 나선 거리에는 약간 햇빛 느낌이 서려있었다. 강 따라 도로 따라 나무 따라 걸었다. Teiguín 마을을 스치듯 지난다. 다음 마을 Pascais에선 사납게 짖으며 쫓아오는 강아지를 만나 화들짝 놀랐다. 목줄도 없어 사정없이 달려든다. 무서운 주제에 짐짓 괜찮은 척 최대한 외면을 했다. 쳐다보지도 않고 일정한 속도로 앞만 보고 걸었다. 한참을 곁을 따라 짖던 녀석이 결국 제풀에 지쳐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주 진땀을 흘렸다. 나중에야 어쩌면 아주 격한 반가움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유난히 오늘 비밀의 마을들>

낮은 철조망을 따라 매달아 둔 나뭇가지는 십자가라기보다는 상형문자에 더 가까웠다. 골목을 벗어나며 한적한 길로 들어선다. 들판마다 소들이 많았다. 그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하며 어쩐지 따스한 마음을 전달받는다. 문득 이해의 마음을 주고받곤 했다. 소리 없는 대화가 그렇게 들과 숲에 가득했다. 안개는 여전했고, 흐리다기보다 습습했다. 그럼에도-그래서 숲길이 좋았다. 적절한 물소리와 밟히는 낙엽이 풍성했다. 쭉 뻗는 나무들이 높다. 기운이 아련히 온갖 것에 서린다.


10시 20분, Gorolfe 마을을 지난다. 집 하나 없이, 그저 아주 작은 성당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진 곳이었다. 여전히 오르막 내리막은 반복됐다. 대체로 길은 한적했다. 오, 조금씩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확연한 빛이 사선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기 약간의 감동이 있었다. 풍경이 변주하며 다채롭게 채색된다. 볕뉘처럼 몽글몽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당장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다 빛의 느낌이 스민다>

11시, 비밀의 마을 Perros. 텅 빈 듯하다. 고사리 돌담이 묵묵히 이어진다. 11시 40분, Aguiada 마을. 여기에도 문 열린 bar는 없다. 힘이 빠져간다. 여태 잘 걸어온 길이 점차 더뎌졌다. 너무 작아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San Mamede를 겨우 통과했다. 아무것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햇빛이 가려졌다 나타날 때마다 덩달아 마음도 오락가락했다.


12시 20분, 사리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야 bar가 나타났다. 무턱대고 들어가 깔리무초부터 시켰다. 시원한 한 모금, 그래 이 맛이지. 두 다리를 뻗고 앉으니 잠시 살만했다. 내려놓은 배낭의 자리가 어깨에 선명히 남았다. 다리에선 쉬이이익-하고 쉰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몸 구석구석이 대놓고 삐걱거렸다. 오세브레이로의 긴 오르막 여파가 뒤늦게 밀려오고 있었다.

<빛을 머금으며 땀을 흘리며, 사리아에 도착한다>

30분간 푹 쉬고 다시 길을 걸었다. 곧 사리아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마음에 드는 느낌이 있었다. 강을 건너고 계단도 오른다. 성당을 지나 1시 10분, 예약한 사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씻고 빨고 정리한 뒤 곧장 식사하러 나섰다. 이 동네에 아주 유명한 뽈보 맛집이 있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인파로 바글바글한 핫플 가게에서 뽈보와 맥주를 후다닥 해치웠다. 현지인들 사이 자리에 합석을 하는 바람에, 정신없이 인사도 나누고 통하지 않는 긴 대화도 이었다. 몽롱할 지경이었지만, 덕분에 많이 웃었고 또 웃은 만큼 더 맛있었다. 맥주와 피로가 흥과 맛을 배가 시켰다. 아, 온몸이 가득 든든했다. 아주 녹진히 녹아내렸다.


동네 산책도 잠시 했다. 골목을 이리저리, 사이사이 마을의 분위기가 좋았다. 언덕 끝까지 올라 성곽을 둘러봤다. 약간의 전망도 있고 얕은 바람도 있었다. 돌아온 숙소에선 음악을 들으며 그간 미뤄둔 파일 정리를 마저 했다. 뒷마당에 앉아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느리게 보냈다. 늦저녁엔 '철의 십자가 삼인방'이 다시 모여 깔리무초와 깔깔깔 대화를 나눴다.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된다. 아무리 즐거워도 제때가 되자 눈꺼풀이 자동으로 감겨왔다.

<뽈보와 깔리무초 그리고 사리아 동네 산책>

아, 오늘도 역시 피곤하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매일 걸으니 지칠 만도 하다. 그럼에도 할만했다. 고생토록 아프던 다리가 괜찮아진 이후로 컨디션이 확 오르긴 올랐다. 벌써 산티아고순례길을 걸은 지도 오늘로 30일째였다.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됐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이 짧게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동시에 꽤 익숙해져 영원히 이어질 것 같기도 하다. 걷고-마시고-쉬고-먹고-자고-걷는, 이 단순한 삶 방식이 내게 썩 잘 맞는 편이었다. 피곤을 자주 말하는 건 그저 팩트로써일 뿐, 그 피로감이 사실 난 참 좋다. 어쩌면 통증까지도.


아직 남았다. 5일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아쉽다. 끝을 마주할 준비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니 길의 농도가 짙도록, 앞으로의 하루하루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꼼꼼히 보고-맡고-들이고-내쉬고 걷고 또 쉬고 싶다.


그러니 일단 자자. 자두자. 무엇보다 잘 자자.

그럴 수만 있다면. 꼭 그럴 수가 있도록.



2024.10.29.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0일 차(누적거리 658.21km)

오늘 하루 45,169보(28.8km)







*2026년 병오년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1월 1일 꼭두새벽부터 오른 한라산 백록담 일출 산행에서 만난 첫 해의 첫 해돋이로 그 인사를 대신합니다! :) 새해에도 어김없이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앞으로도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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