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언덕 빛터널, 어쩌다 삼인방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9일 차

by 달여리
오세브레이로~트리아카스텔라(≈20.81km)


5시 반에 일어났다. 어쩐지 서두르고 싶지 않아 짐을 다 챙긴 뒤에도 한참을 쉬었다. 덕분에 일본식 컵라면으로 든든히 아침까지 먹을 수 있었다. 7시 10분, 길을 나섰다. 웬일인지 평소보다 하늘이 밝아 의아했다. 알고 보니 10월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어제부로 스페인의 서머타임이 끝난 탓이었다. 한 시간이 밀려났다. 한국과는 다시 한 시간이 멀어졌다. 그러니까 어제로 치면 6시 반에 일어나 8시 10분에 출발한 셈이다. 그래도 아직은 어둑한 편이었다.


아랫자락으로 펼쳐진 주변의 능선이 그림자처럼 흐릿했다. 풍경을 머금은 운해가 정지한 듯 넘실거렸다. 오솔길은 자박자박 숨소리 같았다. 입김이 핀 공기는 상쾌했다. 랜턴 없이도 걸을 만큼의 충분한 어스름이 있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날은 밝아오고 있다. 안개과 햇빛, 나무와 이슬이 아침을 다양한 톤으로 물들여갔다.

<안개, 아침, 숲>

도중에 익숙한 동행을 만났다. 자주 봐 이제는 친구처럼 편할 정도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올랐다. 8시 40분, 첫 bar에 들러 커피와 빵으로 한 타임 쉬어간다. 9시 50분, 얕은 언덕을 올라 만난 Albergue del Puerto의 전망이 탁 트여 끝내줬다. 거기서 또 다른 한국 분 동행이 더해졌다. 말하자면 이 셋은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 삼인방이었다. 인증샷을 나누어 찍고, 그 축축한 길을 내린 bar에서 모닥불의 온기도 함께 쬔 사이였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함께 걷다 또 따로 걷는다. 화기애애 대화가 이어지다가도 각자의 생각에 서로 잠기곤 했다. 그런 게 어색하지 않았다. 나이대가 달라도 그런 의미에서 셋은 죽이 꽤 잘 맞는 편이었다.


몽환적인 안개가 산 아래로 흘렀다. 햇살은 이미 하얀빛을 띠었다. 다리에 붙은 그림자가 금세 짧아졌다. 고사리길 새소리가 음악처럼 속삭인다. 도로를 따라 난 흙길을 지그시 밟는다. 평화로운 마음이 한가득 차오른다. 작은 마을을 연달아 지났다. 더 이상 쉴만한 bar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소똥 냄새가 진하도록 진동했다. 안개에 둘러싸인 산속 동네가 그래도 정겨웠다.

<첫 bar와 긴 언덕>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지금 넘고 있는 이 산의 어깨쯤을 타고 가는 길이었다. 오른쪽으로 먼 전경이 흘렀다. 구름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얼룩이 눈에 띄도록 움직였다. 시야에 막힌 것이 없으니 숨마저 후련했다. 평평한 길이라 걷기에도 좋았다. 아, 저기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 썼다.


하산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파르거나 거칠지 않아 내리기 수월했다. 숲과 마을을 번갈아 통과했다. 통통통 달려온 치즈냥이 다리를 붙들며 떼를 썼고, 소들은 아무렇게나 골목을 돌아다녔다. 빛의 터널을 몇 차례씩 통과했다. 그 오솔길 끝에 오늘의 목적지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멋진 고목을 지나 도착한 마을은 고요하고 침착했다. 언제 들어도 좋을 새소리가 팡파르처럼 맑고 곱게 울려왔다. 오후 1시, 그리 어렵지 않던 오늘의 길이 여기서 마무리된다.

<작은 마을들과 빛의 터널, 하산길>

엎치락뒤치락 내려왔던 '철의 십자가 삼인방' 모두 여기가 목적지였다. 너무 배가 고팠다. 각자의 숙소로 체크인하기 전에 일단 식사부터 함께 하기로 했다. 일정도 대략 맞고 마음도 얼추 닿아, 어쩌다 앞으로 남은 일정 동안 자주 볼 사이가 됐다. 친구인 듯 아닌 듯 그러나 다양한 이야기가 재미있게 꽃 피운다. 맥주와 파에야, 샐러드와 스테이크가 차례로 허기를 채워갔다. 붙었던 뱃가죽이 서서히 벌어지며 완만한 곡선을 만들어갔다. 살 것 같았다. 그제야 테이블에 바짝 붙은 몸을 떼 겨우 의자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맥주가 달았다. 무엇보다 이 순간 날이 좋았다.


저녁에 시간이 되면 다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체크인을 했다.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기절할 듯 피곤했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동네 산책을 즐겼다. 숙소 돌아와 침대에 올라 쉰다. 낮잠 아닌 낮잠, 잠시 누워있는다는 게 그만 곯아떨어져버렸다. 그대로 푹 잤어도 좋았을 텐데, 여섯 시쯤 깨어났다. 또 배가 고팠다. 저녁은 근처의 슈퍼에서 사 온 인스턴트 파에야로 간단히 해결했다. 심심한 저녁, 연락이 닿은 삼인방은 짧은 회동을 가졌다. 식사를 했던 그 식당에서 만나 깔리무초를 한 잔씩 마셨다.

<동네 산책, 하루는 금세 저녁으로 닿는다>

벌써 밤이 깊었다. 낮잠 탓에 정작 자야 할 때 오히려 잠이 안 왔다. 알베르게의 불은 일찌감치 꺼졌다. 핸드폰도 눈부셔 그저 감은 눈으로 멀뚱멀뚱 빈 밤의 시간을 보냈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꿈이라도 꿨을까, 자주 깼고 많이 뒤척였다. 아마도 코를 골았을 테고 한 번씩 이유도 없이 놀래기도 했다. 방은 좁았고 이층 침대는 답답했다. 차라리 얼른 걷고 싶었다. 다가올 새벽을 간절히 기다렸다.



2024.10.28.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29일 차(누적거리 633.97km)

오늘 하루 38,169보(22.8km)







*12월 31일 마지막 날, 2025년이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자주 웃기도 했지만, 답답함과 울분, 슬픔이나 안타까움도 무겁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모두가 평화롭고 평온하게, 안전하고 즐겁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해를 맞이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올해 브런치를 시작한 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어 늘 반갑고 감사합니다. 2026년에도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해피 뉴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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