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3일 차
팔라스데레이~아르수아(≈28.11km)
아무래도 잠의 주문이 통했나 보다, 5시에 귀신같이 눈이 떠졌다. 솔직히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지만 간신히 등을 뗐다. 에휴. 동시에 모든 짐을 들고 로비로 내려왔다. 오늘은 정말 긴 길이다. 거의 30km에 육박한다. 다리가 괜찮으니 충분히 걸을 수 있다 판단했다.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일본식 컵라면으로 아침까지 챙겨 먹었다. 여섯 시 십분, 일찌감치 출발했다. 멀다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급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걷는다. 그래도 인도가 잠시나마 있었다. 마지막 간판을 지나자 가로등이 뚝 끊겼다. 얼마간 그 어둠 속을 걸었다. 흙길로 빠지면서 오르막이 이어졌다. 이 외진 곳에 오히려 띄엄띄엄 가로등이 다시 있었다. 하지만 조도가 낮아 음산함만 부추길 뿐, 걷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진 않는다. 오늘도 새벽길은 무섭다. 환한 낮을 상상하며 그 공포를 겨우 견뎠다.
어디선가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옷깃 스치는 소리에도 마음이 깃털처럼 옴싹거렸다. 얼마전 순례길에서 늑대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더랬다. 더없이 어두워도 상관없으니 차라리 그런 상황만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맹수만 아니라면 귀신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귀곡산장이 따로 없지, 마치 폐허처럼 오래된 건물들이 듬성듬성 어둠 아래 다가온다. 웅- 웅- 부엉이 소리가 구슬프게도 들려왔다.
때마침 앞서가는 랜턴빛이 보여 다행이었다. 걸음의 속도가 달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라? 웬걸 삼인방 중 한 분이셨다. 그녀도 한참 무서웠다며 함께 안도했다. 미리 추천을 받아둔 카페가 바로 이 근방이었다. 아침의 카페콘레체가 아주 맛있다고 했다. 도무지 그런 게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어두운 길 위로 따스하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묘하도록 반갑고도 신기했다. 카페콘레체만 시켰는데 첫 손님이라며 쿠키와 블루베리 빵도 주신다. 한국어로 인사까지 해주셔 그만 황송했다. 연신 그라시아스를 외치며 그 모든 감사를 만끽했다. 더군다나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맛있었다. 인스타를 알려주셔 팔로우까지 했다.
길을 함께 걸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덜 힘들 수 있었다. 카페를 나오면서부터는 날이 밝아와 무섭지도 않았다. 다리 건너 이쁜 마을 Furelos에는 9시 반에 도착했다. 조금 더 걸어가 뽈보(Polbo, 문어)의 본고장이라는 멜리데(Melide)에 도착했다. 여기 도시의 향기가 물씬 난다. 큰 거리가 복잡하고 혼잡했다. 추천받은 뽈보 식당으로 찾아가 점심으로 한 접시를 나눠먹었다. 이른 깔리무초로 시원하게 목도 축였다.
흔히 뽈보(문어)라 불리는 요리의 정식 명칭은 '뽈보 아 페이라(Polbo á feira)'로 올리브유, 굵은 소금, 파프리카 가루로 간단히 조리한 갈라시아 전통 음식을 말한다. 양념이 과하지 않아 문어 본연의 맛을 잘 살린 요리로 알려져 있다. 그 본산지가 바로 이곳 멜리데였다. 하지만 되려 사리아보다 맛이 없어 의아했다. 질기다랄까, 푸석하고 힘이 없었다. 아마도 가게를 잘못 추천받았나 보다. 아쉬움에도 40분가량 넉넉히 식사를 나눴다. 생각해 보니 걷는 도중 제대로 식사를 챙긴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10시 반에 다시 길을 나섰다. 이상하게 배낭이 배로 무거워진 것 같았다. 골목을 빠져나와 만난 Igrexa de Santa María de Melide 성당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내부로 가득 퍼지는 음악과 가늘게 비쳐든 빛에 어떤 온전한 울림 같은 게 있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다만 갈 길이 아직 한참이나 멀어 어쩔 수가 없었다.
시골 동네를 걸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숲길도 있었다. 걷고 걸어 또 가야 했다. 오르막이 나올 땐 버겁기도 했다. 다리가 뜨끈뜨끈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산티아고까지 남은 킬로수도 40대로 접어들었다. 도로를 지나고 마을을 통과하고 고가를 건너며, 잎사귀 흔들리는 숲길을 걷는다. 강아지, 새, 고양이, 소, 나무, 바람, 구름이 길의 박자에 맞춰 다가왔다 또 멀어졌다. 그리고 오가는 대화가 있었다. 걸음 외에도 그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느릿느릿 더뎌지며 힘겨움이 턱까지 차오르려던 그때, 드디어 bar가 나타났다.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웃음처럼 토해냈다. 배낭을 던져놓듯 벗어버렸다. 나무 그늘 아래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또 깔리무초로 수혈을 했다. 햇살이 뜨거워 땀도 좀 흘렸다. 먼 들판을 바라보며 맨발을 뻗었다. 사근사근 바람이 씻으니 그만 더 걷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한숨을 잔뜩 내쉰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움직이기 싫음이 자꾸만 더해져 40분이나 쉬고 말았다. 여유를 부려보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왜인지 배낭은 벗었다 멜 때마다 한층 더 무거워진다. 막바지로 갈수록 몸이 과중되는 게 분명했다. 쌓이고 쌓인 피로도 그렇지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힌 마음도 한몫을 단단히 거든다.
강을 건너는 다리, 예쁜 마을 Ribadiso를 지난다. 걸었던 길을 반복하듯 그렇고 그런 길을 이었다. 아마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걸었던 것 같다. 더웠고 지쳤다. 길긴 참 긴 길이다.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Arzúa)에 도착했나 보다. 바닥만 보고 걷느라 그것도 잊었다. 하마터면 놓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는 길가 초입에 바로 있었다. 조금이나마 덜 걸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서로 짠 것도 아닌데 우연히 같은 숙소였다. 오후 3시, 함께 체크인을 했다. 개운히 씻고 빨래는 모아 숙소에 유료로 맡겼다. 큰 숨을 돌렸다. 피곤하긴 진짜 피곤했다.
나머지 한 분과도 약속을 잡아 삼인방이 저녁을 같이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셋의 이름도 이참에 정했다. 두서없는 의견 조율 끝에 결국 셋이 자주 마셨던 음료의 이름으로 담백하게 붙였다. 그렇게 '철의 십자가 삼인방'은 이제 '깔리무초 삼인방'이 됐다. 각자의 별명도 역할처럼 나눴다. 최연장자 '깔리'와 유일한 여성 '무초' 그리고 스페인어로 건배를 뜻하는 '쌀롯'은 내게 명했다. 탕탕탕 결정, 그러고선 짠.
서서히 목적지에 다다르는 대장정의 순례길, 단 이틀만을 남겨둔 이쯤에서 각자의 산티아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아쉬움과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다. 꽤 덤덤한 편인 나도 이 길의 매력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누군가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한 순례길이다. 그저 걸어왔음에 귀한 마음을 가진다.
헤어지는 길, 같은 숙소의 ‘무초’와는 돌아오며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더 마셨다. 길 위에서 만나기 힘든 또래여서 더 반가웠었다. 오랫동안 다양한 트래킹을 즐겨오신 분이라 신나게 들을 것도 많았다. 이런저런 대화가 잘 통해 신기하기도 재밌기도 했다. 어떤 부분에선 길에 대한 덤덤함도 다소 비슷했다.
그러다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산티아고순례길 전반에 깔려있는 하나의 큰 주제이기도 하기에, 사실 길을 걸으며 자주 빠졌던 생각의 주제였다.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런 건 지워지지 않고 잘도 남아있기 마련이다. 나는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다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조차 들지 않았다. 쓸데없이 마음을 소모하지 않는 선에서만 끝없이 미워하기로 했다. 아무리 순례길 위라고 한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길의 역할은 이러한 고민까지의 인도다. 길은 길일뿐 깊숙한 마음은 결국 각자의 몫이 된다. 그저 걸어서 좋았다. 싫은 얼굴들은 일단 지웠다. 떠오르면 떠오를 때마다 미워할 거다. 되도록 떠오르지 않도록, 대신 길을 더 사랑하련다.
숙소로 돌아왔다. 그사이 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선 역한 쉰내가 잔뜩 났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아무도 빨래란 걸 하지 않는지, 너저분한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힘겨운 도보여행길이니 충분히 이해한다. 뭐, 이 정도는 한큐에 용서다. 잠자리에 누웠다. 의외로 빨리 잠에 들었다. 냄새는 잠결에 잊었다. 역치를 넘어 무뎌진 걸지도 모르지만.
2024.11.01.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3일 차(누적거리 733.77km)
오늘 하루 51,501보(30.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