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4일 차
아르수아~오페드로우소(≈19.52km)
5시 반 기상, 6시 반 출발. 어제보다 쌀쌀했다. 아기자기한 아르수아(Arzúa)의 골목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적한 길로 들어서며 가로등이 띄엄띄엄, 사위는 완벽히 어두워져 갔다. 역시나 무서웠다. 단단한 마음을 붙들듯 랜턴을 환히 켰다. 길 따라 수로에서 물소리가 계속 들렸다. 숲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들에 어둠조차 가려졌다.
문득 고개를 올려다보니 수풀 사이로 별이 가득했다. 무서움을 무릅쓰고 랜턴을 잠시 껐다. 완전한 어둠에 잠기자 외려 일순간 공포는 사라졌다. 하얀 별들이 따스했다. 그래, 당연하게도 온전한 이 어둠이란 자연스러운 것. 오로지 온 우주만이 또렷이 거기 있었다. 찰나처럼 나도 함께 자연스러웠다.
숲길은 더 이어졌다. 이따금 으슥한 건물이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했다. 향기만은 더없이 좋았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일정 부분 아늑했다. 투둑투둑, 나무에선 이슬인지 낙엽인지가 계속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딱딱 부러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드문드문 부엉이가 깊게 울었다. 절규에 가까운 동물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느슨했던 긴장감이 한 번씩 쫄깃해졌다. 그럴 때면 가만히 멈춰 하늘을 올려다봤다.
7시 15분, Pregontoño 마을을 지난다. 안개가 몰려와 오묘하도록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몽환적인 굴다리를 통과해 몽롱하게 오르막을 올랐다. 그 위에 A Peroxa 마을이 있었다. 주택이 겨우 몇 채, 문 연 bar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힘들다기보다는 어둠에 마음이 지쳤다. 얼른 환한 곳으로 잠깐이나마 들고 싶었다.
그러다 저만치 앞서가는 여성분이 보였다. 처음엔 무심결에 걸었는데, 아직 한창 어두울 때라 자꾸만 쫓아가게 되는 이 상황이 불현듯 걱정이 됐다. 어쩌면 위험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만큼 자욱한 안개에 분위기가 상당히 으슥하기도 했다. 망설이다 차라리 최대한 빨리 따라가 말부터 걸었다. 부엔까미노. 무섭게 느껴졌을까 걱정스러웠다고 혹시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고 그랬다. 웬걸, 그녀는 오히려 쿨했다.
"헤이, 잇츠 더 까미노. 네버 마인드."
피식. 서로 웃었다. 그 김에 통성명을 했다. 프랑스인이란다. 그러고 보니 전날 카페에서도 잠깐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녀가 먼저 그걸 알아챘다. 나처럼 삭발을 한 그녀가 멋져 보였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건 그녀보다 내쪽인 듯했다. 알고 보니 둘 다 첫 bar를 애타게 기다리고도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걸었다. 허리춤에 든 사진기를 가리켜 조심스레 사진가냐고 물어보신다. 어깨를 들썩, 나도 쿨하게 대답했다.
"노, 저스트 워킹 위드 어 카메라."
7시 50분, Taberna Vella 마을을 거친다. 여기 알베르게 겸 bar가 있긴 있는데, 아뿔싸 문을 닫았다. 11월부터 휴무란다. 하루이틀 차이로 아침의 달콤한 휴식을 놓쳤다. 아주 약간 절망했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우선은 아껴뒀던 사과를 꺼내 물었다. 소똥 냄새를 참으며 아그작아그작 베어 먹었다.
여명이 터오면서 감춰졌던 안개의 속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휘감은 공기는 마치 얇은 솜사탕 같았다. 어둠이 뒤로 물러나며 날은 차례차례 밝아왔다. 빛은 한시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은 채 시시각각 다른 결로 숲과 길을 스쳤다. 안개와 빛, 먼 풍경이 한데 버무려져 말로는 붙잡기 어려울 운치를 만들어냈다. 은은하고도 은밀한 시간이 조심스럽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태양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아, 나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도무지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리는 뿌리처럼 깊게 박혀, 잎사귀 같은 마음을 맘껏 팔랑댔다. 갈래진 빛이 새어 나오며 숨결처럼 퍼져갔다. 빛의 온기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가슴에 닿아온다. 짙으면서도 흐린 그 빛깔은 어쩌면 묵혀둔 기억과도 닮았다. 어떠한 감정이 특정한 이름도 없이 마구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무언가 저절로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눈이 부셨고, 대체로 그건 설렘에 가까웠다.
겨우 걸음을 떼어 길을 나간다. 8시 50분, Calle 마을에서 드디어 문 연 bar를 만났다. 커피와 엠파나다를 시켜 먹었다. 아침의 감정을 따라 한참 넋을 놓고 있는데, 골목을 지나는 '깔리'와 '무초'가 딱 보였다. 헬로. 두 팔 벌려 인사했다. 30분 정도를 쉬며 각자의 식사를 나눴다. 여기서부터는 함께 길을 출발한다. 오늘도 뜻밖의 동행이 생겼다.
유칼립투스 군락지를 지난다. ‘깔리’께서 나뭇잎으로 향기를 맡는 법을 알려주셨다. 거기에선 익숙한 향이 났다. 손에 남은 잔향이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길쭉한 나무들이 만드는 길의 분위기가 멋들어졌다. 알고 보니 유칼립투스는 곳곳에 상당히 많았다. 그러게, 며칠 전부터 자주 보고도 못 알아봤다.
풍경에 감탄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시무룩해지곤 했다. 오늘의 길에서 느껴지는 그 심정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었다. 이제 길은 내일까지 단 이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끝을 미리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절로 떠오르고 애써 지우길 반복했다. ‘끝’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입술 끝에 매달려 간지럽기 그지없었다. 되도록 입밖에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하핫 빈 웃음을 짓고, 괜한 헛 농담을 던졌다.
숲은 길고, 사이사이 마을도 있었다. 도로길을 따랐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낯선 얼굴들을 스쳤다. 10시 반쯤 만난 어느 bar서 깔리무초 한 잔으로 쉬어간다. 다시 숲이었다. 며칠간 반복되던 길의 뉘앙스는 계속됐다. 모쪼록 연일 화창한 날씨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나무 사이로 비쳐오는 빛이 새긴 무정형의 그림자가 인상 깊도록 선명한 풍경이 된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경비행기. 마른 잎과 아직 생생한 초록빛. 잘린 나무토막들과 세상 나른한 강아지. 귀 기울이면 항상 거기에 있는 새소리와 노랗고 파란 순례길의 표식들.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벌써 생활처럼 익숙해져 버린 풍경들이다.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어찌 됐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겠다.
오페드로우소(O Pedrouzo)로 들어가는 길목,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도로 옆 숲길에서의 작은 백파이프 연주였다. 머리 위로 흐르는 나뭇가지에서 길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지막을 향해가는 그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향수를 마구 불러일으켰다. 순간 감상에 젖었고 하지만 곧 다시 길을 이었다.
날씨가 맑은데도 송전탑의 고압 전선에선 무서운 소리가 났다. 작은 비행기가 그 전깃줄 사이를 음표처럼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걷는 속도가 달라 어느 순간부터 '깔리무초 삼인방'과는 헤어지고 말았다. 표식만 따라가다 가려던 알베르게를 그냥 지나쳐버리기도 했다. 조금 돌아와 체크인한 게 오후 1시. 마침 다른 분들도 각자의 숙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배낭만 내려놓곤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심 끝에 정한 메뉴는 멕시코 음식이었다. 퀘사디아가 끝내주게 맛있었다. 맥주는 뭐 말할 필요도 없겠다.
든든한 배로 돌아와 샤워와 빨래를 마쳤다. 홀로 동네를 구경하다 깔리무초도 한 잔 마셨다. 저녁 즈음 삼인방과 다시 만났다. 슬며시 가본 성당은 막 미사가 끝났는지 상당히 북적였고, 어느새 출출했던 두 번째 식사는 역시나 푸짐했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피어올라, 먼 과거의 기억이 갑작스레 소환되기도 했다. 빛이 저무는 석양은 낮도 밤도 아닌 곳에 멎은 듯 보였다. 시간은 다가오지도 밀려나지도 않은 채 거기 잠시 머물러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거리, 우리는 헤어졌다. 숙소는 이미 모두 잘 준비를 마친 분위기였다. 가방을 마저 챙긴 뒤 서둘러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불을 탁 껐다. 순간, 만반의 준비도 없이 성큼 다가온 '마지막'이 어둠의 형태로 눈앞에 확 떠올랐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왜 이토록 의미를 의식하게 되는 걸까. 거푸 감상적이 된다. 아마도 한 달여 동안 걸어온 시간의 걸음, 그 축적의 무게 때문이리라. 그건 내게 매우 낯설고 또 특별한 일이기도 하니까.
침낭을 턱끝까지 끌어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잘 자는 게 더 중요했다. 걱정보다는 기대를, 의미보다는 장면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걸어온 시간만큼 매 순간을 진솔히 마주해 왔기에, 사실 끝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눈을 깊게 감았다. 다행처럼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면 내일은 곧 오늘이 된다.
2024.11.02.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4일 차(누적거리 753.29km)
오늘 하루 38,898보(23.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