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증, 미사 그리고 마지막 회동

끝남과 멈춤 사이, 쉼 하루

by 달여리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일어나기 이렇게 싫을 줄이야. 8시가 되어서야 끄응차 겨우 일어났다. 완주증을 받으러 가야 한다. 선착순 10명에게는 식사권을 준다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뭐 얼마나 많이들 오겠어 싶었다. 그러니 준비도 느릿느릿, 8시 반쯤 나왔다. 골목을 구경하듯 슬렁슬렁 도착한 사무실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딱 봐도 10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받아둘 걸 그랬다. 후회해 봤자 어차피 지난 일. 어쩔 수가 없다.


9시인 줄 알았던 오픈 시간마저 10시로 바뀌어있었다. 얄짤없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 말았다. 여기까지 다시 나오는 게 더 귀찮을 것 같았다. 순례길을 자주 걸었다는 독일 친구가 뒤에서 연신 자랑거리를 늘어나 조금은 성가시기도 했다. 10시 정각에 문이 활짝 열렸다. QR코드까지 입력한 뒤 23번째 순번을 받았다. 나란히 줄을 선 순례자에게 유쾌한 하이파이브를 해주시는 직원분이 계셨다. 아주 잠시 즐거웠고, 낯선 얼굴들은 모두 순간 동질감을 느꼈다.

<사무실과 성당들 그리고 점심의 뽈보플렉스>

다섯 권의 크리덴셜에 인증 도장을 받았다. 완주 증명서와 거리 증명서 발급은 의외로 순식간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받을 게 더 있었다. 발급 사무실을 나와 같은 건물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넘어갔다. 2015년 완주한 제주 올레 완주 증명서를 이미지로 보여드렸다. 여권의 한글명과 영문명을 꼼꼼히 대조해 본인이 맞는지를 확인하신다. 그렇게 제주올레-산티아고순례길 공동 완주 인증서와 그 메달까지 받았다. 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용 새 크리덴셜도 혹시 몰라 일단은 받아뒀다. 양손이 푸짐, 마음도 두둑했다. 더군다나 금속 메달이라니, 어딘가 뜻깊었다. 업된 기분으로 쭐래쭐래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사둔 먹거리로 늦은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12시엔 대성당 순례자 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늦지 않도록 시간에 맞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리증명서, 완주증, 제주올레-산티아고순례길 공동완주증과 그 메달>

숙소에서 가까운 대성당 입구인 뒷문으로 들었다. 정면이 잘 보이는 뒤쪽으로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미사는 곧 시작했다. 근엄한 음악이 육성으로 울렸다. 순간, 목덜미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았다. 범접하기 어려울 어떤 경건함이 있었다. 알아듣진 못해도 그 울림을 느낀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순간, 더러 우시는 분들도 있었다. 나도 덩달아 괜히 뭉클해졌다. '무사히 다 걷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으로 깊숙이 인사를 드렸다. 바욘에서의 미사로 시작된 순례길이 산티아고 미사로 끝이 났다. 이것으로 모두 마무리된 기분이 들었다.


'끝', 마음에도 도장(sello)이 쾅 찍혔다.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가 끝난 뒤엔 성당 내부도 꼼꼼히 둘러봤다. 특별한 미사에 사용되는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향로를 직접 가까이 보니 신기했고, 곳곳의 금빛 장식은 화려했다. 주제단 뒤편으로 올라 성 야고보의 상에 손을 대고 인사를 드렸다. 지하 크립타(Crypta)의 성 야고보 은함 앞에선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였다. '무사'와 '감사'를 다시 한번 고했다. 절로 공손해지는 마음과 함께 산만했던 정신이 가만히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찌 날도 이렇게 절묘히 반응하는지.


아니나 다를까 이상할 정도로 자꾸만 허기가 졌다. 못 참고 평점이 높은 근처 맛집으로 바로 향했다. 혼자서 비싼 뽈보 요리를 시켰다. 맥주도 벌컥벌컥 두 잔이나 마셨다. 낮술에 벌써 취기가 돌았다. 배도 찼겠다 좀 누워 쉬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긴장이 풀리긴 풀렸나 보다. 침대에 녹은 모든 것이 느슨해진다. 세상 편한 낮이 그대로 저문다.


삼인방과의 약속은 7시 반이었다. 시간에 맞춰 장소로 향했다. 식사를 하고 깔리무초도 마셨다. 밤의 성당을 구경하다 뜻하지 않게 멋진 음악 공연도 만났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무척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신나는 그 음악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는 다 같이 웃으며 몸을 들썩였다. 다양한 순례자들이 거기 뒤섞여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어설프게 발을 동동거리며 나도 몸을 스리슬쩍 흔들었다.

<대성당 앞, 밤의 공연>

돌이켜보면, 순례길을 걸는 동안 ‘길’이 아닌 ‘길을 걷는 자신’에 취한 사람들을 경계했다. 그러다 보니 소란과 북적임을 되도록 들여다보지 않았다. 국적을 불문하고 다들 말도 참 많았다. 대다수는 듣는 자보다 말하는 자에 속했다. “누구나 걸을 수 있지만, 아무나 걸을 수는 없는 길” 따위의 빈약한 미사여구 같은 것도 정말인지 듣고 싶지 않았다. 걸으면 그뿐인 것을, 의도적으로 의미를 자꾸 덧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길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보다 난, 지금 이 시간에도 생활전선 위에서 고충을 견디며 일을 하고 있을 수많은 직장인·생계인·자영업자분들이 훨씬 더 존경스러웠다. 실제로 고행은 삶에 있다. 굳이 따지자면 순례길은 고행이라기보다 일탈이나 안락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종교적 의미로 이 길을 걸으시는 분들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도보여행자로서 이 길을 걷는다. 물론 각자의 상황은 모두 다르겠으나, 긴 일정과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순례길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의미로든 여유가 있다는 걸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그 감각을 잊거나 잃고 싶지 않았다. 걸으면서 내내 주시하고 또 기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길이 마무리된 이 시점, 잘 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선 또한 스스로 반성했다.


오래전부터 순례길을 걷고 나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양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 깨달음을 잘 행했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들 않았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가시 돋친 마음이 튀어나오곤 한다. 겨우 3~40일간을 걷고 인생의 크나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는 오히려 지난 삶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아무리 느슨히 생각해도 이 길은 결코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종교적·역사적 의미를 빼고 나면) 그냥 걷기 좋고 아름다운 길고도 긴 길일 뿐이다. 오래 걸으니 평소엔 못 한 생각을 많이 할 수는 있다. 그 과정에서 만약 정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말은 아끼고 그저 삶에서 진득이 실천했으면 좋겠다. 일순간의 감정을 깨달음으로 착각하지는 말자. 고작 한 번의 완주지만, 이런 이야기를 드디어 '경험한 완주자'로서 말할 수 있게 됐다. 표본편향에 가깝다한들 속은 후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고생했고 축하한다. 차갑고 냉소적인 이성과 달리, 감성적으론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800km에 육박하는 길을 걸었다. 다리도 아팠고 몸도 고생했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 또 맞긴 하지. 이런저런 생각에도 사실은 모두를 안아주고팠다. 잘했다 칭찬하고 무조건적으로 북돋아 주고 싶었다.

<밤의 산티아고>

관계에 취약한 내게도 보석 같은 인연이 생기긴 했다. 혼자가 편하고 혼자를 더 좋아하는 내게, 이 '깔리무초 삼인방'은 그렇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여러 우연이 뒤섞이며 순례길의 끝자락 즈음 기어코 만나게 된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편했다.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스러움'을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인연의 끈이 앞으로 더 이어져갈지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아쉽지만 당장의 만남은 오늘로 그 마지막 날에 섰다.


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마무리 테이블은 어느 근사한 bar에서였다. 각자 원하는 음료를 시켰다. 아쉬움이 말보다는 표정에 더 짙게 서려있었다. 12시가 넘어 헤어졌다. 쓸쓸해 보이는 그 뒷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 감정에도 아랑곳없이 잠이 와락 쏟아졌다.

<양면 한 권과 단면 네 권, 가득 채운 크리덴션>

원래는 산티아고에서 이틀만 묵으려 했다. 그 계획을 바꿔, 하루를 더 머물기로 즉흥적인 결정을 내렸다.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은 이미 땅땅땅 끝을 외쳤지만, 이를 연장해 피스테라(Fisterra)나 무시아(Muxía)까지 더 걸어가 보는 걸로 오늘 낮동안 결심을 한 터였다. 하지만 당장 내일 떠나려니 막상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둘러 검색해 보니 다행히 같은 숙소의 같은 방 예약이 아직 가능했다. 얼른 결제까지 마치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루의 유예를 더 둬 '추가 걸음'에 대한 여유를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었다. 아,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졸음이 쏟아지는 데도 역시나 바로 잠들기가 아까웠다.


커튼을 깊게 쳤다. 내일은 무조건 최대한 늦잠을 잘 거다. 진짜 휴식이 필요했다. 쉬면서 갈 길에 대한 정보를 찾고, 그동안 밀린 일들도 처리하련다. 굿나잇. '깔리'와 '무초'도, 순례를 마친 모든 순례자분들도, 모쪼록 안녕히들 주무시길. 앤 굿럭. 그리고 각자의 남은 여정에도 즐거운 행운이 가득 깃들기를.



2024.11.04.

마감과 멈춤 사이, 쉼 하루

오늘 하루 12,572보(8.6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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