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잡아 거듭 길 위로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6일 차(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1/5)

by 달여리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네그레이라(≈20.47km)


6시.


으규규규, 걷기도 전에 곡소리부터 터졌다. 3일 밤을 편히 잤더니 몸도 그만 느슨해지고 말았다. 할 건 다했다. 아침을 먹은 뒤 모닝커피에 샤워까지. 일용할 생수도 가득 채웠다. 짐을 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배낭은 금세 두둑해져 있었다. 어두운 창밖을 노려봤다. 시간을 미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포기한 듯 어영차 무거운 배낭을 둘러멨다. 7시 반, 결심토록 입술을 꽁 다문 채 차가운 거리로 나섰다. 이제 바다로 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이 시작된다. 이를테면 외전이나 에필로그쯤 되는 거다. 당장 4일의 길이 연장된다. 36일 차, 길의 넘버링은 산티아고 도착일에서 그대로 이어 붙였다.


중간에 목적지가 무시아로 마음이 또 바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피스테라로 향해 가려한다. 무시아(Muxía)와 피스테라(Fisterra)의 갈림길인 호스피탈레스(Hospitales)는 3일째 지나갈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목적지 결정의 유예가 가능하긴 하다. 이름은 왠지 무시아가 더 끌렸다. 그러나 피스테라의 '세상 끝(Finisterre)' 절벽에 가닿아야지만 길이 완전해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방향을 피스테라로 정했다. 둘 다 가기엔 당장의 체력이 무리였다. 아님 마지막엔 버스를 타지 뭐. 두 장소 모두에 0.00km 표지석이 있다. 직접 본 그 장면이 어떨지 무엇보다 궁금하다.

<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지도, 출처: gronze.com>

이 길의 시작점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손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어디선가 빵 굽는 냄새가 달콤히 났다. 하늘에는 선명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콕하니 박혀있었다. 가로등이 충분한 데다 날이 완전히 어둡지는 않아, 랜턴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적한 공원을 통과했다. 반가운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방향 표식이 덩그러니 나타났다. 거기엔 새로운 킬로수가 적혀 있었다.


Km 89.586 Fisterra

Km 86.482 A Muxia


띠링. 동전을 넣어 게임이 리셋된 기분이었다. 그저 출발 신호처럼 기지개를 크게 한 번 펴보았다.

<떠나는 산티아고의 이른 아침>

높다란 벽의 골목을 지나 작은 마을을 만난다. 졸졸 흐르는 강가 위로 까까 우는 까마귀가 날아갔다. 울창한 숲을 걷는다. 큰 다리로 개울을 건너, 그대로 물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랐다. 언덕을 오르니 또다시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산티아고 대성당의 먼 풍경이 선명히 바라다보였다. 잠시 이별을 고하기로는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늘도 마침 눈시울을 붉혔다.


오늘의 첫 햇살이 구름을 대동하고 눈부시도록 번져 오르고 있었다. 아, 이 마을에 사시는 분들은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며 살아가겠구나. 산티아고를 일상처럼 마주하는 삶이란 과연 어떤 걸까. 전망 좋은 벤치 곁에 잠시 서 머물렀다. "아직 늦지 않았어. 산티아고로 돌아갈 거면 바로 지금이야." 아주 잠깐이지만 그만 걷고 그냥 돌아가고픈 마음도 살짝 일었다.

<언덕의 마을, 산티아고 대성당을 마주한 일출>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곧 다시 숲. 바닥엔 유칼립투스 이파리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위로 위로 솟은 나무들이 주렁주렁 이파리를 흔들었다. 높다란 가지 끝으로 노란 빛살이 걸치나 싶더니, 산을 넘은 해가 이젠 아주 자신감 넘치도록 눈에 뵈는 모든 곳에 빛을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면면에 생기가 잔뜩 돋아올랐다. 오늘도 맑은 날씨. 주춤이던 발걸음도 점차 제 리듬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을 지난다. 분위기상 문 연 bar를 이르게 만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아침을 먹었는데도 금방 배가 고팠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동네의 어느 꼬마 아이가 갑자기 해맑도록 "부엔까미노" 인사를 해주어, 무방비로 활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침을 맞은 골목이 온통 하얬다. 길은 계속 마을과 숲을 번갈아 지나가는 형태였다. 온통 잔잔했다. 정말인지 고요한 길이었다.

<길의 풍경, 숲과 마을을 번갈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자주 변주했다. 그러나 크게 힘든 구간은 없었다. 땀은 났다. 더운 건지 힘든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드문드문 동네 어르신들이 산책을 즐기는 숲길이 있었다. 바로 곁에서 와락 들린 강아지 짓는 소리에 화들짝 육성을 내지르며 놀라기도 했다. 마을마다의 이름 표지판이 눈에 잘 띄지 않아,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감 잡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이나 쉬었다고 벌써부터 다리가 아팠다. 특히 오랫동안 고통이었던 정강이쪽 느낌이 싸했다. 잠시라도 쉬었다 가야겠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 작은 벤치가 놓여 있었다. 내리 두 시간 반이나 걸어왔다. 10시, 배낭을 먼저 내려놨다. 통증이 무던히 스쳐 지나가길, 부디 다리가 잘 버텨주길 바랐다. 오늘의 목적지까지 11km가 남았다.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가자, 다독이듯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까꿍>

15분을 쉬었다. 쉬는 동안 세 명의 순례자가 곁을 지나갔다. 가방에 달린 민무늬 가리비를 보니 모두 생장에서부터 출발하신 분들 같았다. 부엔까미노를 주고받았다. 익숙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눈빛 교환이 있었다. 마을에선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걸었다. 언젠가부터 bar도 띄엄띄엄 있긴 했다. 그대로 몇 개의 마을을 지났다. 숲과 하얀 벽, 빨간 지붕이 기억에 남는다.


10시 40분, 아- 오르막길 제대로 시작된다. 아무래도 산을 하나 넘어갈 모양이다. 순식간에 온몸이 몽땅 땀으로 젖었다. 숲과 도로를 번갈아, 계속 계속 위로 올랐다. 중간중간 돌로 만들어진 벤치가 있었지만, 멈추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이번엔 결코 쉬지 않았다. 수혈이 필요했다. 깔리무초가 간절히 떠올랐다.


11시 10분, 드디어 내리막이다. 내리자마자 바로 Carballo 마을이 나왔다. 한참 땀을 쏟아 입술 끝이 짭조름했다. 아! 저기 문 연 bar로 우선 가야겠다. 드디어 제대로 된 휴식이 찾아온다. 말해 뭐 해, 들어가자마자 깔리무초부터 시켰다. 영롱한 때깔이 사람 마음을 사르르 녹인다. 맞아, 항상 그랬다. 이걸 시키면 주인장은 대체로 '으음~~'하는 뉘앙스로 뭔가 마음에 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아마 '너 뭐 좀 아는구나.'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멋대로 추측해 본다. 맛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이 자꾸만 이 음료를 더 시키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세요(sello)도 착실히 받고, 휴식도 충실히 취했다. 화장실 볼 일도 덕분에 너끈히 해결했다.

<오늘 아침도 빛이 좋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쉬었나 보다. 아고, 그만 다시 출발하기가 싫어졌다. 아직 한 시간 정도 길이 남았다. 수혈도 했겠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마음을 도닥였다. 이 조용한 마을을 통과한다. 도로인 숲길도 거닐었다. Ponte Maceira 마을의 강과 다리는 진짜 멋졌다. 순례자 여권에는 여기서 세요(sello)를 하나 받으라고 되어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받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프랑스길에서와 달리 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의 순례자 여권에는 세요를 받아야 하는 마을이 아예 따로 정해져 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길을 이었다. 조용히 흐르는 물가라, 걷는 숲길이 좋긴 좋았다.


도로를 따라 오르막을 올라 수국 핀 담벼락을 지났다. 아름드리나무가 늘어선 예쁜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내리자 바로 오늘의 목적지 네그레이라(Negreira)였다. 흐흐. 내내 힘들어해 놓고 막상 도착하니 기분이 한껏 차올랐다.

<날이 좋아 사실 걷기도 좋았다, 어쩌면 산책처럼>

오후 1시, 미리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샤워한 뒤 빨래까지 마치고 나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일단 잠시 누워 쉬었다. 한국과의 짧은 통화도 했다. 밥 먹기 전 근처 bar에서 맥주부터 한 잔 하고팠다. 주문한 맥주를 받자마자 선 채로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절로 캬~~~~!! 탄성이 터졌다. 그 모습을 본 주인장이 완전 빵 터진 건 안 비밀.


배가 고프긴 한데, 이상하게 음식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쑤셔 넣는 게 나았다. 고심 끝에 찾은 건 구글 평점 5점의 케밥집이었다. 알베르게에서 걸어서 12분 거리. 좀 멀긴 하지만 동네 구경 삼아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네그레이라는 생각보다 큰 마을이었다. 막상 케밥은 좀 느끼해서 남겼지만, 배가 부르긴 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까지 누워서 쉬었다. 근처에 큰 마트도 있어 저녁은 장을 봐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러니 저러니 하다 보니 벌써 잘 시간이 다 됐다. 날씨가 이렇게 좋았는데도 빨래가 덜 말라 걱정이었다. 우선 방으로 거둬와 침대에 다시 널었다. 뭐 마르겠지, 내일 아침까진 두고 봐야겠다.

<네그레이라>

다시 걷는 길이 익숙하고도 어딘지 낯설다. 더 걷고 싶으면서도 그만 걷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기도 하고, 바로 지금 당장 끝나버릴 것도 같았다. 아무렴 '세상의 끝'은 꼭 보고 싶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머릿속 깊숙이 맴돌던 '세상 끝' 이미지와 얼마나 닮았을지도 궁금했다. 그 벼랑 끝에 선 채로 센 바람을 맞으며 옷깃이라도 한 번 신나게 흔들어보고 싶다. 날씨가 허락한다면, 석양도 아주 멋지겠지. 그게 이왕이면 두 발로 걸어간 길의 끝이길 바랐나 보다. 그래.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거지.


길지 않다. 앞으로 3일 남았다. 다만 27km인 내일은 길이 길다. 일찍 자는 게 좋으련만 잠은 왜 이리 또 안 오는지. 많이 뒤척이고 말았다. 바로 옆 한 침대에 누운 연인의 애정 행각에 정신이 혼미하다. 숙박객이 몇 되지도 않는데, 텅텅 빈 밤이 아주 혼란하게 흘렀다.



2024.11.06.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36일 차(누적거리 793.63km)

오늘 하루 36,759보(2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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