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8일 차(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3/5)
라고~쎄(≈24.55km)
늦잠이라도 잔 줄 알았다. 그래봤자 겨우 여섯 시였다. 분명 네 시 반쯤 눈을 떠 시간을 확인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꿈이었을까, 먼 침대 누군가의 알람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게 바로 지금이었다. 자동처럼 매일의 준비를 순서대로 마쳤다. 어제 무리로 느낀 다리의 근육은 최대한 정성껏 풀어줬다. 안티푸라민도 덕지덕지. 양발의 물집은 별도리가 없다. 그냥 견디자.
그나마 잘 잔 느낌이었다. 새벽이 그다지 춥지도 않았다. 비가 온다 했는데 아직은 습하기만 했다. 올려다본 검은 하늘엔 약간의 별까지 보였다. 길을 나섰다. 일곱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근처 축사에서 젖소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의 마지막 가로등을 지나면서부터는 헤드랜턴을 켜고 걸었다. 총총총 얼룩무늬 고양이도 있고, 후다닥 사라지는 쥐색 쥐도 보였다. 분뇨 냄새 가득한 시골길을 걸었다. 바닥에 소똥이 천지라 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가로등은 다시 나타나더니 또 사라지곤 했다. 길이 보였다 감춰졌다 그랬다.
걷다 보니 생각에 잠긴다. 지나온 시간이 두루두루 머릿속을 스쳤다. 편협했던 모든 장면들이 두서없이 다시 떠올라 괴로웠다. 혼자 떠난 길에서 왜 이리 함께 있지들 못해 안달이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마음일 거라 함부로 여겨지는 것도 때론 불쾌했다. 그러다 보니 그만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말들 많던 다들, 시끄럽다 치부하고 외면해 버린 속내 그 못남들이 뒤늦게 몰려와 뾰족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아무런 사건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형태로 남아 속이 쓰렸다. 그건 상당히 피로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와 부끄러웠다. 고민컨대 정작 외롭고 안타까운 인간은 비좁은 나 아니었을까 싶었다. 솔직한 외로움을 나누며 자연스레 '함께'를 이루는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더 건강한 것일지 모른다. 혼자 있고 싶다고 그만 굳게 닫아버린 그 아집이, 뒤돌아 못내 아프다. 그러게 나이가 들어도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애먼 마음에 다름을 틀림으로 납작하고 바라보고 말았다. 반복된 과오, 역시나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반성한다. 나는 어둠 속의 랜턴과도 같았다. 시야가 좁디좁고, 작고 얕았다. 길을 걸으며 만났던 그 갖은 사람들에게 문득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걸은 어둠 속 새벽길이었다.
분주한 축사에서 웬 가루가 잔뜩 날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똥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아 찝찝했다. 퉵퉤텟, 피할 구석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별것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재빠르게 지나가고픈데, 하필이면 이때 신발 끈이 풀렸다. 적당한 자리를 잡아 단단하게 매어줘야 했다. 배낭이 무거워 허리 숙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오갈 때 없이 결국 가루를 많이도 맞았다.
다시 어둠으로 든다. 숲과 마을이 반복됐다. 7시 40분, a ponte olveira 마을. 어둠이 내린 강을 걷는다. 번갈아 도로도 따라 걸었다. 축사가 유독 많은 이 길이었다. 그 축사만이 거리마다 환히 밝혀져 있었다. 서서히 여명이 터온다. 이제 맨눈으로도 길을 인식할 만큼 된다. 하늘과 땅, 그리고 걸음이 보였다.
8시 5분. 가지런한 동네 olveiroa 마을. 문 연 알베르게 겸 bar가 몇 있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타이밍.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대로 지나쳤다. 아직 비가 내리지 않으니 그 김에 더 걸어가는 게 나았다. 변경된 예보에 따르면 10시부터 비가 온다 했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아무래도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 지나 숲길이었다. 그 숲의 향기가 좋았다. 아마도 유칼립투스 향인 듯했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은데,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그치긴 했지만 이미 우비를 꺼내 입은 뒤였다. 걷다 보니 더워 결국 벗었다. 그랬는데 다시 내린다.
언덕을 하나 오른다. 그리 높지는 않았다. 저 먼발치 아래 푸른 강도 활기차게 흐르고 있었다. 비는 오다 말다 계속했다. 그에 맞춰 우비도 덮다 말다 그랬다. 그래도 와장창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락가락 동작이 기어코 귀찮아, 부슬비 정도는 그냥 맞기로 하고 우비는 배낭에 걸쳐두고 걸었다.
계곡으로 내렸다가 다시 언덕을 올랐다. 멀리 동쪽으로 살짝 개인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9시, Logoso 마을. 열린 알베르게 겸 bar가 있었지만 또 지나쳤다. 일단은 좀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희미한 햇빛이 비치기도 한다. 날이 확 개기라도 할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살랑거렸다.
9시 20분, 호스피탈레스(Hospitales)를 통과한다. 쉬어갈 bar를 발견했다. 지금이 딱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카페콘레체와 초코레또를 시켰다. 이제 13~4km 정도가 남았다. 30분을 쉬며 크게 한숨을 돌렸다. 거의 3주 전인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 커뮤니티 디너에서 만났던 캐나다 커플을 우연히 여기서 다시 만났다. 오며 가며 길 위의 참 신기한 인연들이다. 반가웠다. 긴 대화는 없어도 마주한 눈빛 사이 어떤 교감 같은 게 있었다.
커피와 빵을 먹고 나니 그래도 힘이 났다. 뒤꿈치의 물집이 제일 거슬렸지만, 무릎과 정강이는 아직 쓸만했다. 약간 절뚝였으나 걷는데 무리는 없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곧 무시아(Muxía)와 피스테라(Fisterra)의 갈림길이 나왔다. 두 개의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방향을 피스테라로 잡았다. 이미 그러기로 처음부터 정했고 여태 걸어오며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다. 찰칵, 사진으로 남겼다. '길의 갈림길'이란 상징이 괜히 의미 있게 느껴졌다.
도로길은 이내 들판 사이의 오솔길로 바뀐다. 바람에 낡은 이파리들이 날리며 후두득 떨어졌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이 구간이 좋았다. 이윽고 갈림길이 한 번 더 나왔다. 뭔가 결정 번복의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선택하세요. 아직 무시아로 갈 방법이 있답니다." 하지만 역시 고민 따윈 전혀 없었다.
언덕을 오르내린다. 한적한 숲속 성당은 문을 굳게 닫았다. 여전히 빗방울은 떨어지다 말다 했다. 감질나게, 그러나 겨우 이 정도의 비에 감사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길을 계속 이었다. 임도를 자주 걸었던 위클로웨이 생각이 많이 났다. 더웠다. 길은 한없이 스산했다.
언덕길을 한참 동안 걸었다. 12시 10분에서야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오늘의 목적지 쎄(Cee)는 어떤 곳일까 궁금하려던 찰나, 내리막 숲길 너머로 바다가 갑자기 확 드러났다. 아, 이번엔 CTC의 로빈후즈베이(Robin Hood’s Bay)가 떠오른다. 여러 여정의 풍경들이 한데 뒤섞이며, 한꺼번에 와르르 밀려왔다. 감상과 감정, 생각과 상념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러다 한 번에 쑤욱 빠져나간다. 그 자리를 채우듯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파하- 하고 웃음이 함께 틔였다. 다다르는 느낌이 진하다. 언덕을 내려갈수록 바닷가의 예쁜 마을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습도 때문인지 손이 끈적했다. 아마도 마음이 그러했다.
12시 40분, 그렇게 쎄(Cee)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비가 와락 쏟아졌다. 휴, 세이프. 운이 좋았다. 예약한 알베르게가 마침 마을 초입에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바로 옆 bar에서 목을 축이며 시간을 기다렸다. 주인장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30분 후쯤 이리로 오신다. 역시 또 첫 번째 숙박객이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샤워와 빨래를 즐겼다. 비도 오겠다 오늘도 건조는 코인 세탁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왠지 모르게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고 싶지 않았다. 마트가 멀긴 해도 마을을 구경할 겸 먼 장보기 산책을 나서보기로 했다. 정겨운 바다 마을, 걸으면서도 그리운 기분이었다. 모든 게 예쁘게 보이는 건 그새 비가 그쳐서인지도 몰랐다. 잔잔한 물결과 무심한 표정들이 모두 사랑스러웠다. '세상의 끝'에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저녁은 간단한 요리로 해결. 식사 후엔 노곤해 침대에 누워 좀 쉬었다. 조용히 가라앉은 이 시간이 무엇보다 편했다.
해질녘쯤 해서 바닷가로 슬렁슬렁 걸어 나가 본다. 습습한 기운이 쓸쓸한 저녁의 분위기를 북돋았다. 한창 찌푸린 하늘에도 그 구름을 뚫고 석양이 놀랍도록 삐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 풍경에, 무심결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일고 말았다. 어쩌면 귀에 꽂고 있던 음악 때문이었을까. 뭔가 위로받는 마음이 한껏 일렁였다. 무작정 이해하고 오롯이 끌어안아주는, 그토록 따스한 빛깔이었다. 무엇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라 더 그랬다.
하마터면 길가에 주저앉아 엉엉 울 뻔했다. 그런 느낌으로 뭔가 막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목 끝까지 넘어오는 울컥거림을 겨우 참았다. 사진기를 들며 짐짓 모른 척하려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감정보다 풍경에 집중했다. 어쩌면 그마저 어떠한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상황에 부합하든 아니듯, 내심 주저앉아 펑펑 한 번 울어보고도 싶었다. 순수한 감정만으로 차오를 그 순간이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그러지는 못했지만.
곧장 숙소로 가지 못하고, 부두에서 마을의 중심가로 빙 둘러 천천히 거닐었다. 낮에는 닫혔던 성당이 문을 열어 짧게 구경을 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근처 bar에 들어 화장실 이용비 대신 맥주 한 잔을 시켜 마셨다. 돌아온 숙소에서는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 입구 맡 벤치에 앉아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말을 많이 시켰고 대체로 들었다. 억지로 웃었고 몇몇 얼굴을 익혔다.
일찌감치 누웠다. 역시나 일찍 잠들질 못한다. 생각과 상상은 그 사이로 마구 나래를 편다. 내일이면 '세상의 끝' 피스테라로 닿는다. 그 절벽에 서면 정말 모든 게 끝난 느낌이 들까, 궁금했다. 그 기대감인지 아쉬움인지, 석양의 잔향인지 좁은 도미토리방의 불편함인지, 잠이 잘 안 왔다. 기어코 끝까지 밤을 설치고 말았다.
2024.11.08.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38일 차(누적거리 846.60km)
오늘 하루 47,034보(31.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