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9일 차(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4/5)
쎄~피스테라~파로데피니스테레(≈14.88km)
밤 사이 같은 방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들. 끝없는 상념에 더해 여러모로 불편한 밤이었다. 새벽 3시에 깼다. 로비로 나와 한 시간쯤 있어도 봤지만, 결국 더는 잠들지 못했다. 시간을 기다리다 6시쯤 짐을 모두 챙겨 나왔다. 얼른 준비를 마친 뒤 7시가 되기 전에 아예 숙소를 나섰다. 사실 남은 길이 짧아 일찍 출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진저리 치듯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지. 나름대로의 이른 여유를 그저 즐기는 수밖에.
밤사이 좀 추웠다. 침낭을 아무리 끌어당겨도 해소가 안될 만큼의 차가운 공기가 있었다. 차라리 바깥은 그보다 나았다. 며칠 동안에 비해 그래도 꽤 쌀쌀한 편이긴 했다. 어제저녁 따스했던 바다는 어둠에 잠긴 채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감정처럼 그립도록 바라봤다. 순례길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늘을 여기서부터 찬찬히 밟아 나간다.
마을을 에두른다. 어제 몇 번 다녔다고 고새 익숙한 게 신기했다. 아침은 고요했다. 곳곳, 거리를 청소하거나 아침 재료를 배달하는 분들만이 외로이 분주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은 옷가게들을 지나 뒷골목을 올랐다. 어느덧 쎄(Cee)의 반대편 Corcubión 마을까지 넘어왔다.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먼 풍경을 구경하듯 그 길을 거닐었다. 서늘한 기운에도 기분만은 포근하고 편했다.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듯한 Bar가 하나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 전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주문을 받아주신단다. 까페콘레체와 초코레또를 시켰다. 역시나 오늘의 선택도 순례길 공식(?) 아침 메뉴다. 이 마을에 할당된 세요(sello)를 덕분에 이렇게 채워간다. 겸사겸사 식사도 해결했다. 바삐 걸어갈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모닝커피를 곁들인 새벽 바다를 즐겼다.
새소리가 들린다. 슬금슬금 하늘이 푸르러져 갔다. 써보지도 못하고 필요가 없어진 랜턴은 배낭에 넣었다. 그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마을을 마저 올랐다. 마침 문이 열린 성당에서 좋은 기운도 받았다. 골목마다 아카시아향 비슷한 게 짙게 풍겨와 향긋했다. 11월에 도대체 무슨 꽃일까. 비파일까, 유칼립투스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그 꽃은 색채도 없이 향의 기억만 잔뜩 남겼다.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뒤를 돌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 켜진 가로등이 하늘과 바다에 아름다운 정점을 찍어대고 있었다. 손을 번쩍 흔들어 인사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안녕.
낮은 돌담길이 비밀의 장소처럼 걸음을 이끈다. 헉헉, 그 언덕을 올랐다. 왼쪽으론 흐린 빛이 터오고 있었다. 뒤쪽으로 멀어지며 등은 바다를 떠난다. 8시 40분, 숲을 통과해 A Amarela 마을을 지난다. 도로를 따라 걷는다. 집과 마을, 언덕과 숲을 번갈아 비슷비슷한 길을 통과한다. 떠난 줄 알았던 바다는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드러난 바다마다 어쩐지 그 빛깔은 재각기 달랐다.
9시, Estorde 마을이다. 여기에선 카레향이 났다. 슬쩍씩 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표지석의 남은 숫자가 어느새 10km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대신 산티아고로 들어갈 때처럼의 카운트다운 느낌은 나지 않았다. 이번엔 페퍼민트 사탕 대신 비타민C 사탕을 먹었다. 걸음에선 상큼한 레모나 맛이 났다.
10분쯤을 더 걸었나, 곧 다음 마을 Sardiñeiro였다. 반짝반짝 낮은 일렁임이 어디론가 어른거렸다. 그 빛에 이끌리듯 길에서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갔다. 작은 공원 너머로 하얀 백사장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 뜻하지도 않게 멋진 휴식처를 찾았다. 두터운 먹구름을 뚫고 나온 첫 햇살도 마침 비쳐 내린다. 온기를 잔뜩 머금으며 바다 내음을 흡수했다. 가방을 벗고, 약간 흥얼거렸다.
모처럼 바다를 제대로 봤더니 힘이 불끈 솟았다. 그 용기를 빌어 이어진 언덕을 힘차게 올랐다. 갈매기 소리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뒤를 따라왔다. 파도 소리도 희미하도록 함께 묻어있었다. 돌담이 이어진 숲길, 고사리와 바다의 기운 모두 제주를 떠올리게 했다. 짠내와 흙내가 뒤섞인다. 땀도 또롱또롱, 숨이 거칠어졌다.
언덕을 다 오르자 가장자리로 탁 펼쳐진 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피스테라(Fisterra)가 아름답도록 자리 잡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반가워.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먼저 건넸다. 언덕을 내리고 도로를 건너 이윽고 해변으로 닿는다. 아, 그 낯섦이란. 10시 20분, 하얗고 고운 백사장 위로 섰다. ‘세상의 끝’으로 향해가는 길에 아주 넓고 긴 주단이 깔린다. 부서지기라도 할까, 사푼사푼 걸음을 조심히 옮겼다. 희뿌연 가루가 파도에 흩날렸다. 몸의 무게만큼 발자국이 짓눌렸고, 떼는 만큼 길은 조금씩 밀렸다. 그 감촉은 실감이었다. ‘끝’이라는 상징이 ‘실재’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지나가는 주민께서 반가운 얼굴로 조개껍데기를 선물로 주셨다. 부엔까미노. 그 다정함에 마음은 한결 몽글해져버리고 말았다. 수면의 빛을 지그시 바라보다, 물결 따라 있는 힘껏 넘실거렸다. 움직임은 어디든 끊임이 없었다. 그 위로 빛살은 아무렇게나 미끄러지며 반짝였다. 이대로라면 몇날며칠이고 해변을 따라 끝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해변 중간쯤 물이 차오른 구간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반대편 산책길로 빠져야만 했다. 갈대숲 같은 길이었다. 순례자보다는 주민이나 관광객들을 더 자주 마주쳤다. 이윽고 해변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은 도로를 따라 올라 마을로 다다랐다.
11시 5분, 피스테라에 도착했다. 거리엔 사람들이 갑작스레 많아졌고, 여럿 분주했다. 흐린 날씨와 축축한 공기가 어우러져 피스테라의 인상을 완성시킨다. 터미널엔 이제 막 도착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로 가득했다. 매우 배가 고팠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길을 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방향을 올랐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길의 종점 파로 데 피니스테레(Faro de Finisterre/세상 끝의 등대)까지는 겨우 3km 남짓이다.
이곳의 지명인 피스테라는 라틴어 Finis(끝)와 Terrae(땅)를 합친 말로 단어 뜻 그대로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 로마인과 중세 유럽인들은 정말 이곳이 땅의 끝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긴 해가 바다로 사라지는 곳 너머로 더 이상 세상이 이어져있을 거라 상상하긴 어려웠을 것도 같다. 죽음과 시작을 동시에 품은 장소로 여긴다. 그러니 절벽의 끝에서 과거의 나를 태워 보내 새롭게 태어나는 순례의 의식도 행해졌다고 한다. 파로 데 피니스테레는 바로 그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거기 태워진 흔적과 버려진 신발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 0.00km 표지석 또한 세워져 있다. 산티아고 아니라 여기를 zero point로 잡았다는 건 어쩌면 하나의 역설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도달하는 목적지', 여기 피스테라는 '의미적 완성'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끝에 도달했기에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햇빛과 구름, 비가 모두 한데 있었다. 재미있다 생각했다. ‘끝’으로 향해가는 지금, 뭐 이왕이면 모든 날씨가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나 싶었다. 버겁긴 버거웠다. 그동안에 비해 비교적 짧은 거리를 걸어왔는데도 그랬다. 다리에 좀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관성이라는 게 있었다. 비는 다시 그쳤다.
왼쪽에 바다, 오른쪽으론 이차선 도로. 그리고 도달하려는 걸음의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굽이진 길이 끝나는 지점, '길 없음'. 11시 50분, 도착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지막에 다다랐다. 주차장이 먼저 나왔다. 등대도 멀찌감치 드러났다. 어딜까. 사람들에 가려 대번에 보이지 않았다. 어? 저기 0.000km 표지석이 보인다. 조금씩 다가섰다. 두근두근 세근 네근.
그리고 그 앞으로 드디어 섰다.
신기했다. 진짜 있었다. 정말 여기였다. 0.000이 주는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가히 묘했다. 아마도 뿌듯함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0의 무게만큼 그건 묵직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지나가는 분께 인증샷도 부탁하고, 한참 있다 다른 분께 더 요청하고 그랬다. 내겐 무척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그러고 싶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욕심이 없는 편인데도 이번만큼은 꼭 얼굴로 사진을 남기고자 했다. 뒤늦게 현타가 와서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맥주부터 마셨다. 카페가 하나 있었다. 바다를 보고 앉아 엠파나다와 함께 먹었다. 비쌌다. 비싸도 괜찮았다. 거기 있었다. 바다를 보며 ‘끝’을 가늠하는 시간을 얼마간이고 가질 수가 있었다.
절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도 벗었다. 사실 사진을 찍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후련했다. 시원한 공기가 맨 발끝을 적셨다. 그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 정말 길이 끝난 기분이 든다.
다시 ‘끝’
절벽에 앉아 듣고 싶었던 음악이 이미 있었다.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자잘한 물결조차 멈춘 듯 느렸다. 수평선 위로 그인 노란빛이 무언가를 말해주려 했다.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음악이 흘렀다.
Ego Wrappin’
BYRD
08:51
시간이 정지. 뭔가 많은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음악에 잠긴 파도 소리만이 아마 있었다. 갈매기가 머리맡을 한참 맴돌다 떠났다. 마치 짧은 대화라도 나눈 것처럼 충만했다. 거기 잠시 빠졌다.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길은 끝났다. 순례길이 여기서 끝났음을 오롯이 느꼈다. 멎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슬며시 미소를 지어졌다.
절벽 위로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는데, 좀 전 0km 표지석 앞 인증샷을 찍어주셨던 분께서 슬쩍 말을 걸어오셨다. 뒤에서 몰래 나를 찍은 사진이 있다며 보내주고 싶다고 하신다. 아, 마침 나도 그녀가 절벽 저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멀찍이 찍은 것이 있었다. 에어드랍이 어쩐지 잘 되지 않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서로 농담처럼 웃어댔다. 사진을 주고받고 통성명을 했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온 에스메랄다라고 했다. 감사했다. 그 호탕하고 예쁜 미소가 여기 풍경과 함께 오래 기억에 남을 듯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신발을 다시 신었다. 그리고 가방을 멨다. 3km 남짓을 다시 내려 피스테라로 가는 길, 발걸음은 오히려 더 가벼웠다. "세상의 끝에서 길이 끝났다." 기분은 그 어감처럼 꽤나 근사했다. 그걸로 됐다.
구글맵을 보고 찾아간 알베르게, 2시 10분에 체크인을 했다. 씻고 빨래부터 했다. 오늘도 건조는 유료로 맡겼다. 잠부터 쏟아졌다. 누워서 좀 쉬다 시간이 아쉬워 동네 구경에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에 들러 피스테라 완주증도 받았다. 끝을 축하하며 제대로 밥을 먹고 싶은데, 하필이면 식당이 모두 씨에스타로 마감할 즈음이었나 보다. 식당 세 군데에 튕기고 나서야 결국 포기, 그냥 마트에서 장을 봤다. 2유로짜리 와인 한 병을 사 왔지만 혼자 마시기엔 많아 공용 주방에 계신 다른 분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쉬었다. 쉬다 늦저녁에 나가 맥주도 한 잔 마저 마시고 왔다. 밤이 되어서야 비는 그쳤다. 습하고 어두웠다. 멀리서 본 것과는 달리 피스테라는 어딘가 스산했다. 마주한 풍경이란 마음을 닮는 걸까. 아마도 비수기인 데다 비가 와서 더 그럴 것이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어떡하지. 이후의 여정은 전혀 정해놓은 바가 없었다. 피스테라에 하루 더 묵으며 고민을 해볼까, 하지만 딱히 그러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무시아(Muxía)로 가보자. 이름의 뉘앙스 때문인지(꼭 '메시아'처럼 들린다), 거기로 가면 새로운 영감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무시아행 버스는 하루에 딱 한 대, 11시 반 출발이었다. 그때까지 그럼 뭐 하지. 아니, 그럴 거면 그러지 말고 그냥 걸어가 버릴까.
내뱉고도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피곤하고 지쳤는데도, 이미 '길은 끝났다'라 땅 찍었는데도, 생각은 기어코 걸음으로 닿는다. 제풀에 기겁을 하면서도 차근차근 마음의 준비는 절로 다 됐다. 내일 하루 더 걸어가는 걸로. 무시아까지, 그래 이다음의 끝까지.
역시 잠이 잘 안 왔다. 결심을 하고서도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 꼬리를 무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내일은 온종일 비 예보가 있어 걷는다면 무조건적인 고행이 예상됐다. 28km가 넘는 긴 거리니 더 그럴 수밖에. 분에 넘치는 욕심일지, 버리지 못한 미련일지. '끝'은 이미 반복해 새겼지만 아직 마침표는 찍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무시아는 그 점(.)과도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걸어가 봐야 알 수 있을지. 하긴 걸어가 보면 뭔들 알게 되겠지.
2024.11.09.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39일 차(누적거리 861.32km)
오늘 하루 38,728보(25.4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월/수/금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